Day 202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Mostar) 근교
스플리트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보았던 동네가 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갈 수 있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 근교 투어를 예약하기 위해 들른 여행사에서, 그 동네가 포함된 당일치기 여행 상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바로 예약했다.
오전에 여행사 앞에 모인 인원은 열명 정도였다. 우리는 가장 먼저 티토 터널에 갔다.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본명 요시프 브로즈, Josip Broz Tito)는 1950년대에 소련을 경계해 침략에 대비하면서 비밀리에 이 같은 공군 격납고를 지었다.
30미터 길이의 U자 터널은 지금은 이렇게 음침하게 버려져 있다. 불빛 하나 없는 터널을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면서 조심히 걸어 들어갔다. 안쪽에서 가이드가 사람들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숨이 턱 막히는 터널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밖으로 나와 가이드는 보스니아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울하고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들. 어릴 적 가이드가 실제로 목격한 일들,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니 더욱 생생해서 끔찍했다. 이들에게 전쟁은 20년 전 과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들을 괴롭히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블라가이(Blagaj)였다. 이곳에는 강가 옆 깎아지른 절벽에 블라가이 테케(Blagaj tekke)라는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듯 물이 굉장히 맑았던 이곳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곳인데 생각보다 한적하고 예뻤다.
가이드 투어의 특성상 한 곳에 길게 머물지 않아서 사원 내부까지 들어가 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대신 물가를 걸어 다니면서 함께 투어에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미국인 커플은 남자는 중국에서 일하고 여자는 호주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2년 넘게 장거리 연애를 하다, 지금은 둘 다 그만두고 함께 1년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다른 커플은 아일랜드 남자와 아르헨티나 여자가 영국에서 만나 지금은 브뤼셀에 살고 있으며, 조만간 아시아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장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음 여행지에 대한 힌트를 받을 수 있어 좋다.
세 번째 목적지는 내가 버스에서 보았던 바로 그 동네인 포치테리(Pocitelj)였다. 지나가면서도 느꼈듯 굉장히 오래되고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은 요새와 같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성벽을 따라 끝에 있는 탑에 올라서서 마을의 모습을 내려다보기로 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건너편 산 뒤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산불이 난 것이다.
심지어 한 곳이 아니었다. 이쪽 말고도 나중에 모스타르로 돌아가는 길에는 실제로 나무들이 벌겋게 불타고 있는 모습까지 보았다. 당시 크로아티아에는 굉장히 큰 산불이 나서 한국 지인들의 연락이 오던 때였다. 하루 종일 보스니아의 슬픈 역사를 들었는데 이렇게 산불을 목격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안타까운 재해는 잠시 접어두고, 탑에서 마을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푸른빛이 살짝 도는 모스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스니아는 지형상 언덕진 곳들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요새는 언덕의 반대편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성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계단에는 옆에 난간이 없었다. 계단은 좁고 가파르고 미끄러웠는데, 심지어 사람 두 명이 동시에 떨어질 수도 있을만한 크기의 창들이 옆에 크게 뚫려있어 굉장히 불안했다.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다리에 힘을 얼마나 세게 주었던지 허벅지가 쑤셨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애초에 이 투어를 예약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던 크라비체(Kravice) 폭포였다.
도착했을 때 나는 조금 실망했다. 사진들로는 그리고 1~2년 전의 여행 후기들로는 크라비체 폭포가 굉장히 한적한 곳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플리트비체처럼 숲속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숨겨진 비결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폭포는 도로 바로 옆에 있었고 생각보다 작은 데다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나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요한 숲속 호수와 폭포를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는 꽤 큰 세 개의 야외 식당 중 하나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당황스러움을 공유했다.
그렇지만 마음껏 수영할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의 최대 장점이었다. 플리트비체에서 할 수 없었던 걸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폭포수를 맞을 때는 마사지를 받는 기분도 들었다. 다음에 가게 되면 아침 일찍 가보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수많은 사람들 중 동양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스타르 시내만 해도 종종 동양인들을 보았는데, 이날은 하루 종일 한 명도 마주친 일이 없었다. 유럽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신기했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 물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햇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30분 정도 물속에서 놀 수 있었다. 세계여행을 하기 전만 해도 이렇게 야외에서 수영하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갈라파고스 이후로 나는 호수든 바다든 어디든지 물만 보면 풍덩 빠지게 되었다.
모스타르에는 생각이 많을 때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파가 많아도 여유가 느껴지는 곳은 많지 않다.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 모스타르에 가면 금세 편안해질 것 같다. 따뜻함이 있던 보스니아가 그립다.
# 사소한 메모 #
* 1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일주일 넘게 있어도 즐거울 것 같은 동네. 꼭 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