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04, 205 -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
모스타르를 떠나 다시 크로아티아로 돌아왔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네 밤을 자기로 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향했다. 최근 이동이 잦았던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지낼 여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여행은 늘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기 마련이다.
언니, 흐바르 갔다 왔어요?
두브로브니크에서 묵었던 한인 민박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묵었던 호스텔을 연상케 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긴 건 민박집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와, 이틀을 머물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이 친구의 매력에 빠져 5일을 머물고 있던 친구였다. 둘은 나를 보자마자 흐바르(Hvar) 섬에 다녀왔느냐고 묻더니 다음날 1박 2일로 다녀오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어넘겼다.
일단 오늘은 쉬어야겠다 했더니, 이번에는 부자(Buza) 카페 뒤 절벽에 수영하러 가자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하자고 설득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결국 더위를 식히기에 바다 수영만 한 것도 없는 것 같아 따라나섰다. 부자카페는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 내 두 군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의 카페는 지금은 없어져 수영하러 오는 사람들뿐이다. 대부분 다이빙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차가운 물에 풍덩 빠져드는 것이 싫어서 옆길로 내려가 얌전히 수영만 했다. 물은 생각보다 깊었다.
저녁은 10유로만 내면 사장님 댁에서 멋진 식사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삼겹살에 소시지, 라면 등을 안주 삼아 와인과 맥주를 마셨다. 역시나 그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흐바르 같이 가요"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고려해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내 계획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우리는 술이 줄어드는 속도만큼 친해졌고, 툭 던지는 말들은 친해질수록 내 안 깊숙이 더 콕콕 박혀 들었다.
나는 결국 이 즉흥 여행에 참여하기로 했다. 낮에 수영도 결국 같이 갔던 것처럼. 이 여행은, 한 오빠가 혼자 차를 렌트해서 자그레브까지 올라가기로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에 합류해 흐바르까지만 함께 여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모두들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 나이도 제각각 하는 일도 제각각 여행 온 계기도 제각각이었다. 출발 하루 전 비행 편을 예약하고 여행지 도착 후 차를 렌트한 사람, 크로아티아 여행이 두 번째여서 가이드 역할을 해준 사람, 이 민박집에서 일하고 있던 영업력 뛰어난 사람, 그 영업력에 넘어가 친구와 여행 왔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만 계속 남아있던 사람.
그리고 이미 흐바르를 지나쳐왔는데 역행하게 된 나. 도착한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두브로브니크를 떠날 계획에 동의한 나. 여유롭게 쉬겠다고 4박 5일 계획해놓고 갑자기 바쁜 흐바르 1박 2일 일정을 끼워 넣은 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어젯밤의 일들이 모두 현실이었는지 되짚어봐야 했다. 짐을 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피곤함에 잠시 후회했지만, 곧 렌터카에 오르자 엠티를 가는 것처럼 마냥 들떴다. 알게 된 지 24시간도 안 된 사람들은 다행히 모두들 편하고 유쾌했다. 전망이 예쁜 곳들에서는 차를 잠시 세워두고 내려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운전에 자신 없는 내게 유럽 자동차 여행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보스니아 국경을 또 한 번 넘고, Drvenik이라는 이름의 항구에 도착했다. 카 페리를 기다리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들고 해변가를 걸었다. 갈라파고스에서 보았던 바다만큼 투명하게 맑았다.
이곳에서 흐바르까지는 배를 타고 약 40분 정도 가면 되었다.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진을 찍느라 앉을 새도 없었으니까.
우리가 도착한 항구는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달려야 했다. 이쯤 되니 우리는 이미 서로를 몇 년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들으며 시끄럽게 노래했고 같은 풍경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여름 휴가철이었지만 가서 무작정 숙소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두세 번 문을 두드린 끝에 150유로짜리의 굉장히 큰 방을 발견했다. 어차피 남자 둘은 미리 예약된 방을 쓸 것이어서 여자 세명이 묵을 공간만 필요했고,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큰 방을 원한 것이 아니라는 걸 어필한 끝에 겨우 110유로로 깎았다. 주인아주머니도 빈방으로 두기보다는 누구에게라도 빌려주는 것이 나을 테니 깎아주셨던 것 같다.
짐을 풀고 들뜬 마음으로 달려 나온 흐바르는 정말 예뻤다. 아침까지만 해도 전날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살짝 후회했는데,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섬도 예뻤고, 사람들도 좋았고, 내가 세운 계획에서의 일탈이 묘하게 쾌감 있었다.
내가 애초에 혼자서 흐바르에 다녀오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혼자서는 이 휴양지가 즐겁지 않을 것 같아서였고, 두 번째는 당일치기 투어로 다녀오기엔 아쉬울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지나친 곳을, 운 좋게도 두 가지 이유를 모두 없애주는 사람들을 만나 오게 되었다.
시간이 늦어서였는지, 사람이 없는 곳을 잘 찾아서였는지, 우리는 우리만의 풀장에서 수영할 수 있었다. 늦은 오후여서 물이 찰까 걱정했지만 막상 물속에 들어가니 금방 따뜻해졌다. 물이 맑아서 발이 닿지 않는데도 바닥이 다 보였다. 흐바르도 두브로브니크도 물이 허리까지 오다가도 조금만 더 나가면 쑥 깊어져서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수영은 잘 해도 깊은 바다는 아직 무섭다.
수영 후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석양을 보러 갔다. 배들이 둥둥 떠있는 수평선 너머로 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건 바닷가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
낮게 깔린 구름들이 많아 자다르에서처럼 새빨갛고 둥그런 태양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구름 덕에 하늘의 모습은 더 신비로웠다.
우리는 그렇게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해가 지고 초승달이 떠오르는 것까지 보았다. 피곤했음에도 곧장 숙소로 가지 않은 것은 꼭 이곳에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흐바르에서 밤을 보내지 않으면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낮에 물속에서 더위를 시키던 사람들은 밤이 되자 모두들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름마저 신나는 '훌라훌라' 카페에서 우리는 칵테일을 식전주 삼아 네온 불빛들 아래에서 건배했다.
그렇게 밤 분위기를 조금 느끼다, 식사를 하러 돌아갔다. 식당에서 식사해도 좋지만, 이럴 때는 숙소에서 고기와 소시지를 구워 먹는 것도 좋으니까.
야심 차게 리조또까지 하고는 시간 늦어지는 것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니 이야기도 다양했다. 새로운 사람을 한 명만 만나도 화젯거리가 많아지는데, 네 명이나 있으니 이야기가 쉽게 끊길 리 없었다.
전날 늦게 잔 거에 비해서는 개운하게 일어났다. 세 명이서 묵은 숙소에는 세 개의 방과 세 개의 화장실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큰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는 푹 잤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에는 흐바르 성으로 향했다.
흐바르 성에서의 전망은 굉장히 예뻤다. 바닷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섬의 전체적인 풍경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지붕 마을은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성에서 본 전망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흐바르는 바다까지 함께 하니 만만치 않았다. 멀리 떠 있는 작은 섬들과 배들이 오가며 그린 흔적들이 모두 그림 같았다.
오랜만에 혼자 여행하는 것이 아니니 내 사진도 많이 생겼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원래 계획은 성을 구경한 후 서둘러 근처 다른 섬에 가는 것이었지만, 선착장에 가보니 이미 표가 매진되어 그냥 흐바르 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표가 없어 가지 못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바닷가에서 보냈다. 내가 흐바르에 오기 위해 나름대로 포기한 건 두브로브니크의 선셋 카약이었는데, 이곳에서 대신 소원을 풀었다. 카약은 없어서 카누를 탔는데 팔 힘이 꽤 들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이미 두브로브니크에서 2인 카약을 타봐서 별로 타고 싶지 않았을 오빠가 고맙게도 같이 타 줬고, 넘실대는 파도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사진도 멋지게 남겨줬다.
카누를 다 탄 뒤에는 그늘 밑에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청포도를 먹고, 에어베드에 누워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방해할 것이 없는 진짜 휴양이었다. 혼자였다면 수영을 30분이나 했으려나. 카누든 에어베드든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1박 2일간의 환상적인 휴가도 마침내 끝이 왔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지막으로 두 명은 이곳에서 스플리트로 갔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은 다시 두브로브니크로 되돌아가야 했다.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배 안에서 또 한 번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또 하나의 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헤어짐은 잠시, 우리의 단체 채팅방은 쉴 새가 없었다. 그리고 내 여행이 모두 끝날 때까지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들의 여행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지금도 그들과는 일상을 주고받기도 하고 여행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서로의 추억을 나누고 있다.
# 사소한 메모 #
* 우연히 예약한 민박집에 우연히 모인 사람들. 계획에 없었던 일들이 우연에 이끌려 하나 둘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 ♬ Taylor Swift - Shake it o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