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08 - 그리스 델피/델포이 (Delphi/Delphoi)
8년 전 처음 그리스에 갔을 때는 하얀 건물들과 푸른 바다의 청량감 넘치는 풍경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주목적이 산토리니(Santorini)였다. 물론 아테네(Athens)의 유적들을 보며 신화 속 장면들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그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다녀온 뒤에야 나는 '공중 수도원'이라 불리는 메테오라(Meteora)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그리스 여행은 오로지 메테오라에 가기 위해 계획했다. 아, 물론 내가 그리스 음식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메테오라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아테네에서 출발하는 1박 2일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는 첫째 날에는 델피(델포이, Delphi, Delphoi)를, 둘째 날에는 메테오라를 보고 오는 일정이었다. 가는 길에는 그리스의 예쁜 소도시들을 지나갔다. 차를 타고 갔다면 내려서 바람이라도 잠시 쐬었을 텐데.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1박 2일 투어도 드물게 훌륭한 투어였다. 버스에 20명 넘게 타고 있었는데, 가이드는 한 명 한 명의 자리를 돌아다니면서 통성명을 하고는 지도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탈 도로와 대략적인 일정을 소개해주었다. 버스 내에서, 그리고 유적지 내에서 적절한 농담을 섞은 적당한 길이의 설명은 그 누구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델피는 고대 그리스의 4대 성역 중 하나로, 아폴로 신전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따라 걸으면 유적들을 볼 수 있다. 가장 처음 만나는 것은 이곳의 원래 주인인 괴물 피톤(Python)이 지키고 있던 '세상의 배꼽(Omphalos of Delphi)'이라는 돌이다.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피톤은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폴로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 뒤에는 기원전 490년 그리스 - 페르시아 간 유명한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성전이 있다. 제물 등을 올리던 곳이라고 하는데, 유일하게 멀쩡해 보이는 이 건물은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해준 이야기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동물을 제물로 바칠 때 동물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동물들은 '제물로 바쳐져도 되겠느냐'는 사람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러니 무슨 도리가 있었겠나. 동물들의 머리 위에 물을 살짝 뿌리면 동물들이 고갯짓을 해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건 동물의 동의를 구했다기보다는 인간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의식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동의를 구한다는 발상 자체가 흥미로웠고, 그들이 동물을 경시해서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델피 성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아폴로 신전은 4세기에 로마 제국이 이를 모두 이교도로 금지하면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재건된 옆의 작은 성전과는 달리 부서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넓은 터와 위엄 있는 기둥들로 여전히 그 위용을 묵직하게 과시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앞서 언급한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이자 독사의 모습을 한 피톤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폴로가 피톤을 죽이고 이곳을 관장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아폴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또는 가이아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4년에 한 번씩 경기와 제물을 바치는 피티아 제전(Pythian games)을 열었다. 피티아 제전은 현대 올림픽의 기원이 된 4대 제전 중 하나라고 한다.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웠지만 주위 풍경이 워낙 멋져서 남아있는 기둥들만으로도 이곳의 찬란했던 과거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에게 보여준 상상도 역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날도 무지하게 더운 건 어쩔 수 없는 기본 옵션이었다. 결국 가이드가 추천한 원형 극장까지만 천천히 올라갔다, 시원한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서둘러 내려갔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앗아간 사랑스러운 새끼 고양이가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박물관에는 델피에서 발굴된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왠지 이날은 가이드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했던 것 같아서 열심히 둘러보진 않았다.
점심 식사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했다. 나는 첫 끼를 무사카(Moussaka)로 정했다. 그리스식 라자냐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무사카를 먹어보지 못해서 늘 그리웠다. 인도계 미국인 가족과 함께 동석해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아들이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한 미국 학교 학생이었다. 그 친구가 아는 유일한 한국 대학교의 이름이 우리 학교의 이름이어서 좁은 세상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식후에는 계속해서 차를 타고 달렸다. 가이드는 중간중간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카루스 이야기, 오이디푸스 이야기 등등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신화들을 그리스인 가이드에게서 다시 들으니 재미있었다.
우리 숙소는 메테오라가 위치한 칼람바카(Kalambaka)라는 마을에 있었다. 저녁 식사는 호텔에서 제공되는 뷔페식이었는데 맛은 괜찮았지만 내가 몸이 좋지 않은 것인지 입맛이 별로 없어서 많이 먹지는 않았다. 푹 쉬어야 하는데 밤새 모기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물론 내가 졌다. 완패. 아침에 일어나 보니 팔다리는 물론 미간과 턱, 볼에도 벌겋게 물린 자국이 올라와 있었다.
# 사소한 메모 #
* 유럽 여행 마지막 목적지. 예전에도 그리스가 마지막 목적지였던 것 같은데. 뜨거운 이별을 좋아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