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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17. 2018

맑은 유럽의 마지막 하늘

Day 210 - 그리스 아테네(Athens)

어느덧 기나긴 유럽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두 번째 방문하는 아테네는 그런 휴식을 취하기에 딱이었다.

메테오라 투어에 다녀온 날 저녁, 저녁 식사를 할 겸 야경을 보러 나왔다. 언덕 위에 아크로폴리스(Acropolis)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을 잘 볼 수 있다는 루프탑 바 한 군데에 가봤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냥 나왔다. 사실 자리를 알아보는 동안 야경은 다 봤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대신 자그마한 가게에서 꿀과 말린 과일을 올린 그릭 요거트를 사 먹고, 닭고기와 채소를 꼬치에 꽂은 수블라키(Souvlaki)를 먹으며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했다. 수블라키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맥주가 시원해서 밤이 달콤했다.


그다음 날은 같은 방을 쓴 아이만 아니었다면 일찍 나가지 않았을 것 같다. 내 잠을 깨운 건 엄청나게 큰 소리의 욕설이었다. 그녀는 내가 깬 뒤로도 1시간 넘게 갖은 욕을 섞어가며 시끄럽게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해달라고 말해보려 했지만, 통화 내용이 너무나 무서워서 그냥 내가 피하기로 했다.

쫓겨나다시피 나와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다. 전날 검색 없이 들어간 식당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검색을 열심히 해보았다. 그릭 샐러드와 기로스(Gyros, 피타 빵에 고기, 채소, 소스 등을 넣어 샌드위치처럼 먹는 그리스 음식)가 내 기분을 풀어주었다. 음식 때문에라도 세 번째 그리스 여행이 필요할 것 같다.

식사 후 올리브유와 꿀 등 기념품 구경을 하며 걷다 보니 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 근처에 이르렀다. 어차피 박물관이나 파르테논 신전 등에 들어갈 계획은 없었으므로, 좋은 전망이나 보기로 했다.

8년 전에도 일부 공사 중이었던 파르테논 신전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매우 정교한 보수 작업 중인가 보다.

당시 나는 한인 민박에서 머물렀는데, 그 민박집에서는 밤에 함께 필로파포스 언덕에 올라 맥주를 마시는 야경투어를 진행했다. 아테네 시내의 야경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노랗게 빛나던 아크로폴리스의 근사한 모습이 기억난다.

낮에 보는 풍경도 멋졌다. 작은 구름 조각들이 떠 있는 예쁜 하늘과 어린잎들이 섞인 초록 숲이 그림 같았다.

반대편으로 걸어 내려가 보니 저 멀리 리카비토스(Lycabettus) 언덕도 보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는 리카비토스 언덕은 아테네 시내 전경을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저번에도 이번에도 가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다녀온 사람들이 후기에 남긴 사진들 중 내 마음을 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내려와 아크로폴리스 근처로 걸어가 보니 익숙한 돌 언덕이 있었다. 전에 이곳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았었다. 민박집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분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처럼, 누군가도 어느 장소에 가면 나를 기억해주려나.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구름과 반달 사이에 걸려 있는 운동화 한 켤레를 발견했다. 영화 <빅 피쉬>에서 주인공이 떠나지 못하게 그의 운동화를 이렇게 걸어둔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나도 내 운동화 한 조각 한 조각을 곳곳에 두고 가는 것이 아닐까.


# 사소한 메모 #

* 여럿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 룸은 마치 러시안룰렛 같다. 어떤 룸메이트가 걸릴지 모른다.
* 한국에서 진짜 맛있는 그리스 음식점을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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