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스포츠계에는 강압에 의한 폭력이 있고, 여전히 법조계는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가벼우며, 여전히 우리 사회는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 발전하려나 싶다가도 결국에는 변화가 없었다. 조재범 코치의 성폭력과 국민영웅 컬링팀의 부패에 터지던 울화는, 오덕식 판사가 n번방 사건을 맡지 못하도록 청원을 하던 국민들의 분노는, 안희정과 오거돈과 이윤택에 격노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故최숙현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트라이애슬론 김규봉 감독, 안주현 '팀닥터'
올림픽 메달에 우수한 성적만 거두면, 감독과 코치의 비인간적 행태들은 눈감아주는 현실이다. 잊을만하면 체육계의 비리, 체육계의 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그 중심에 선 사람들은 변화의 의지도 없이, 단지 운이 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린 나이부터 분명한 위계질서와 상명하복 속에서 자란 선수들은 자연히 가스라이팅 되고, 감독과 코치, 협회는 이들이 반항하면 폭행과 폭언을 휘두른다. '이렇게 해야 좋은 성적을 거둔다', '요즘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거다'라는 말로 선수들 개개인의 인권은 뒷전이다. 이제 사라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매번 똑같은 말로 사과하고, 똑같은 말로 조사와 대처를 다짐하는 것도 참 지겹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 불발
우리 법조계는 유독 성범죄에 관대하다(혹은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지르면 심신 미약으로 감형, 젊은 의대생/법대생이 범죄를 저지르면 앞날이 창창해서 감형, 데이트 폭력은 단순 폭행죄로 치부되어 벌금형. 최근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불발된 것 역시 커다란 이슈였다. 해외에서는 이용자들이 5~20년씩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반면, 정작 운영자인 손정우는 솜털 같은 처벌을 받았기에, 그 역시 저지른 범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그가 미국으로 송환된다고 해도 이미 우리나라에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고작)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형을 살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처벌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저 자금세탁이라는 죄목만이라도 미국에서 보다 중대한 처벌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나라 범죄자를 우리나라가 처벌하는 것이 옳다는 것,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타워크레인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우리 구역이니까 30층짜리 건물을 직접 짓겠다고 나서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성폭력으로 피소당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
법조계의 판결들이 이렇게 일관적일 수 있는 건,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성범죄에 대한 관용 때문일 것이다.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만 '무죄 추정의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 역시 그렇다. 인권변호사였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던 정치인이 성폭력으로 피소당한 뒤 그 어떤 대꾸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정 정치적 신념을 배제하고도 그의 죽음이 성폭력 피소와 연관이 없어 보이는지 묻고 싶다. 심지어 몇 달 전 나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에서 코로나 19로 인해 가급적 조문객을 받지 말라는 행정명령이 있었는데,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죽음은 서울특별시장으로 5일장에 시민분향소까지 차렸다. 법적으로 드러난 게 없어서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기 어렵다고 하던데, 근거 없는 비난이 싫으면 근거 없는 두둔도 없어야 한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다음날 나는 수없이 많은 기사 제목들을 보고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지지자들 "일어나라" 오열>, <"허망하게 가다니...">, <'서울특별시장'으로... 시민 조문 허용>, <"박원순 시정철학 계속돼야">... 피해자들이 이런 뉴스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너 때문에 사람 하나가 죽었어', '네가 오해한 것 아니야? 이렇게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잘못했을 리 없잖아'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죽은 사람에 대한 인권은 존중해주면서, 왜 산 사람에 대한 인권은 존중해주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 사회는 여러 차례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으면서도, 매번 똑같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일까? 변화하고 있기는 한 걸까?
한동안 갑질과 권위적인 문화가 크게 이슈 된 이후 우리 사회가 많이 발전한 줄 알았으나, 나는 공공기관에 근무하며 그 표면만 달라졌음을 느꼈다. 해외 손님들 앞에서 발표하던 주무관이, 과장이 중간에 나가자 갑자기 발표를 중단하고 단상 옆으로 한걸음 나가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당시 갸우뚱하며 뒤돌아보던 해외 손님들을 보며, 행사 중간 발표자에게 손을 흔들고 인사하던 과장을 보며, 어찌나 창피하던지.
집에서 연고와 반창고로 대처할 문제가 있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사진 촬영을 하고 수술을 받아야 할 문제가 있다.어쩌면 우리 사회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자꾸만 그때그때 반창고로 덮어두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미투 운동을 경험하고, 수많은 국민청원들이 올라오고, <82년생 김지영>이 대단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천천히 변하고는 있구나' 하며 안심했던 스스로를 탓해본다. 빠르지는 않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말로 고개를 끄덕였던 지난날을 후회한다.
이 속도로는 안 되겠다. 남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으니 언젠간 되겠지, 하고 있으면 안 되겠다. 우리는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좀 더 깊이 변해야 한다.
온몸이 썩어가고 있는데 심해 보이는 상처에만 반창고를 살포시 얹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다 같이, 온몸이,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