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라파스 국제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기 위해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아무거나 타면 불법 운행 차량일 수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야 택시를 탈 수 있냐고 영어로 두 차례 물어보니 직원이 인상을 팍 쓰고 귀를 들이댔다. 음... 그렇다면, 'El taxi? Donde? (택시? 어디?)'라고 짧디 짧은 스페인어를 끄집어내 보니 그제야 비로소 빠르게 스페인어로 답하면서 손짓을 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고, 손짓만 보고 택시 탑승장을 찾았다. 그래도 명색이 국제공항인데 기본적인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페루 쿠스코에서는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신 일이 있었다. 얼굴 전체에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나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사와 간호사들과 대화하기 위해 손짓, 발짓, 인터넷 사전과 스페인어식으로 발음한 프랑스어까지 총동원했다. 주사를 언제 놔줄지 궁금할 땐 손가락으로 팔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Cuando? (언제?)'라고 물었고,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궁금할 땐 음식을 가리킨 뒤 오케이 사인을 하며 고갯짓을 했다. 속 시원하진 않아도 어떻게든 소통은 할 수 있었지만, 퇴원하는 날 아침에는 병원 내 약국에서 실랑이가 일어나고 말았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 중 절반밖에 없다기에 나중에 다른 약국 가서 사겠다고 하니 그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있는 약만 달라고 카드를 내밀었더니 갑자기 카드 결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제 저녁에는 카드 받아주더니 오늘은 왜 안 된다는 거야?', '왜 의사는 자기 병원에 있지도 않은 약을 처방해준 거야?' 등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어와 한국어와 화난 제스처뿐이었다. 결국 배낭 메고 나가려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카드 계산을 받아주며 약을 건네주었다.
페루 쿠스코에서 엄마가 하룻밤 입원해 계셨던 병원
물론,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말을 조금이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딜 가든 최소한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만큼은 현지 언어로 익혀두는 편이다. 그래도 갑자기 그 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수는 없기에, 결국 본론을 이야기할 때에는 만국 공통어인 영어를 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가끔 전혀 통하지 않는 곳들에 가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남미 대부분의 지역들이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스페인어 단어 몇 개는 외칠 수 있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스페인어는 내게 여러 차례 찔러본 감 같은 존재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가장 여러 번 시도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스페인어 공부라고 답할 것이다. 처음 시작해본 건 중학교 때 우연한 호기심에서였는데,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면서 중단했다. 그러다 고2 때 제3외국어로 스페인어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수능이 가까워지면서 또 그만두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프랑스어문학을 전공하는 바람에 대체로 뒷전이었음에도 몇 차례 공부를 다시 시작했었다. 회사에 입사한 뒤에는 제대로 마음을 먹고 아예 스페인어 자격시험을 등록했으나, 갑자기 해외출장이 잡혀 시험을 칠 수 없게 되면서 또다시 흐름이 끊겼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기회는 있었지만 약 5년 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쭉 손을 놓고 있다. 투자한 시간으로 따지면 이미 실력이 중급 이상이어야 할 테지만, 매번 오래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초급 공부만 무한 반복하였다.
핑계는 다양하고 많지만, 자꾸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당장 필요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지금 당장 스페인어를 쓰지 않아도 삶에 불편할 게 없고,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변화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배울 때는, 특히 언어를 배울 때는, 그 환경에 둘러싸여 당장 긴급한 필요를 느껴야 빨리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프랑스 교환학생을 갔을 때 처음 한 달 동안은 파리에서 어학원을 다녔다. 한국에서 학교 다니며 학원 다니며 배웠을 때보다 그 한 달 동안 실력이 훨씬 더 많이 향상되었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프랑스어로 주문할 때마다 뿌듯함을 느낄 때, 그리고 서점에서 '이 중국애 뭐래니'라는 식의 인종차별을 겪고 제대로 대꾸해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때, 공부에 대한 열의가 불타올랐다.
그러니 다음에 또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할 때는, 스페인어권 나라로 갈 것이다. 이왕이면 페루에 가고 싶다. 페루는 세계여행 당시 첫 출발지였고, 그중에서도 쿠스코는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였다. 그러므로 한 달 이상 머문다면 역시 페루 쿠스코 만한 곳은 없다.쿠스코에서 배우게 될 스페인어로 남미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 아직 안 가 본 쿠바나 과테말라에도 가보고 싶고, 이전에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여행했던 볼리비아나 칠레, 에콰도르도 스페인어로 다시 여행해보고 싶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서 이틀 연속 먹었던 친근한 식당에 가서 스페인어로 주문하고, 칠레 산티아고 중앙 시장에서 스페인어로 흥정해 과일을 사보고 싶다. 아! 그리고 아쉬웠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다시 가기로 했었지. 스페인어로 여행하면 여행지에 대한 느낌이 저번과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겠다. 내가 기대하는 것처럼.
페루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행에 있어서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외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도 충분히 세계를 여행하며 현지인들과 어울릴 수 있다.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우리 엄마는 저 멀리에서 공을 잘못 찬 아이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셨지만 그 아이의 몸짓과 표정만을 보고 공을 그쪽으로 다시 뻥 차주셨다. 그러니 내가 끝내 스페인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리 실망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여행은 늘 새로움을 발견하는 여정이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그 새로움에 또 새로움을 더하는 일이다. 현지에서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일이다. 배운 걸 실시간으로 활용하는 재미도, 어학원에서 만나게 될 전 세계 사람들도, 한 가득 추억으로 채워질 것이다. 언젠가 스페인어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그런 일상 같은 여행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