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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해야 한다는 강박

다리 찢기

by 바다의별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한 번 시작했으면 꾸준히 해야지.'


대체 왜?

왜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도전이라고 치켜세우고, 시도 후 중단하는 건 포기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고개 숙이게 만드는 걸까?


꾸준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결국 쉽게 시작하지 못하게 만든다. 관심 있는 활동을 놓고 '내가 과연 이걸 꾸준히 할 수 있을까',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등을 오랜 시간 고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다리 찢기에 도전을 해본 적이 있다. 클라이밍을 하다 유연성을 길러보겠다고 발레를 시작했고, 발레를 하다 보니 나도 다리 한 번 제대로 찢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주 어릴 때는 잘했던 것 같은데 이제 내 다리는 아무리 양옆으로 힘차게 벌려보아도 120도 남짓이었다. 노력해서 180도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이것저것 따라 해 보았다. 누워서 다리를 양옆으로 쭉 떨어뜨려도 보고, 양다리를 벌리고 앉아 이리저리 몸을 굽혀도 보았다. 하지만 그다지 변화는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떤 동작을 하든 아파지는 순간 그만두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무래도 혼자서 하기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즈음, 인터넷에서 다리 찢기를 도와주는 학원을 발견했다.


"이거다!"


스트레칭을 체계적으로 도와주어 다리가 서서히 찢어지게 해 준다고 했다. 아프다는 후기가 많이 있었지만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클라이밍도 참아낸 나인데, 스트레칭쯤이야. 그것보다는 비포와 애프터 사진들을 보며 나는 얼마나 더 찢을 수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곧장 시작하고 싶었지만 인기가 많은 수업이라 두 달 정도 선착순에 밀렸다가 겨우 수강신청에 성공할 수 있었다.


1811-detailp.jpeg 사진 출처: The Ballerina Project


'나도 이제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가?'


허황된 것을 알면서도 아주 부풀어 날아오를 듯한 마음을 안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마사지하듯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었다. 그때도 움찔움찔 조금씩 아팠지만 생각보다 참을만했다. '이 정도 가지고 아프다고 했던 건가?' 비웃기 시작한 찰나, 본격 스트레칭이 시작되었다.


"악!"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다리가 찢어질 것 같다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다리가 짓이겨질 것 같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분명 다리가 아픈 것인데 머리까지 그 고통이 찌르르 올라오는 듯해 눈물마저 핑 돌게 했다. 새로운 동작을 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제발'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고, '왜 나는 돈을 내고 이 고통을 사고 있는가'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학원의 효과는 있었다. 나 역시 비포와 애프터 사진을 찍었는데 4주 만에 내 다리는 아주 조금 더 찢어져 있었다. 평평하게 펴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KakaoTalk_20231003_155438038.jpg


하지만 나는 재등록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다리 찢기를 하고 싶었던 열망의 크기는, 그 고통의 양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단순히 유연성을 조금씩 기르다 보면 다리가 언젠가 쓱 하고 쉽게 찢어지는 건 줄 알았더니, 다리의 근육을 뼈의 길이만큼 늘려야 하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일을 계속 이어나갈 의지가 내게는 없었다.


친구는 내가 한 달 수강 이후 그만두기로 했다고 하니 '너답지 않다'라고 말했다.


"나다운 게 뭔데?"

"클라이밍은 엄청 아프다더니 지금도 하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나는 굉장히 괴로워했다. 수업 첫날 널브러진 비닐봉지와 같은 모습이 되어 집에 돌아오던 게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도 이걸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클라이밍은 계속하다 보면 덜 아프리라는 희망이 보였다. 첫날보다 셋째 날이 조금 덜 괴로웠고, 일곱째 날부터는 아픔이 조금씩 무뎌지는 듯하더니, 2주 후에는 습관적인 '어우, 아파' 혼잣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고통이 줄어듦에 따라 덩달아 성취감도 느끼면서 자연스레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반면에 다리 찢기는 점차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다리가 조금 더 벌어지면 그다음에는 더 벌리기 위해 또 아프고, 그다음에 또 아프고... 무한 고통 루프에 빠진 기분이었다. 성취감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재미는 더더욱 느끼지 못했다. 한 달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찢겠다던 나의 도전이 아무런 의미 없는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리를 찢는 데에는 실패했을지라도,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찢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게다가 유튜브 영상들에만 머물지 않았고 학원을 등록해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지도까지 받아봤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좀 더 해볼 걸’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싫어한다. 인생을 송두리째 포기하려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죄책감 없이 포기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도전해서 끝을 보면 좋겠지만, 아닌 것 같을 때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포기는 때로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이기도 하고, 더 멋진 도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관심이 있는 일이 있다면 머릿속으로 고민하기를 그만두고 당장 시도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건 해봐야만 알 수 있는 법이다. 나에게 맞는 일을 발견하면 계속 이어서 할 활동을 찾게 되어 기쁘고, 나에게 맞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대로 의미 있는 경험으로 남는다. 무엇이든 직접 해보는 것만큼 분명한 해답은 없다. 내 리스트는 여전히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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