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한국어교원자격증이 있다. 네팔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따지 않았을 자격증이다.
나는 네팔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매연 가득한 카트만두도, 언젠가 패러글라이딩을 해보고 싶은 포카라의 호수도, 힘들었던 만큼 생애 최고의 성취감을 느꼈던 히말라야도. 매일 한 번은 먹던 네팔의 녹두죽인 달밧도 맛있었고, 히말라야에서 고산병을 이겨내기 위해 먹던 양파수프와 레몬 생강차도 달콤한 추억이 되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가이드 아저씨한테 여쭤봤다.
"네팔에 사는 한국인들은 보통 뭐 하면서 살아요?"
"주로 식당을 하거나 한국어 선생님을 하죠."
나는 식당을 할 정도의 요리 실력을 갖추지도 않은 데다 그만한 체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어 선생님! 그건 도전해 볼 만할 것 같았다. 한국어 선생님을 향한 나의 여정은, 네팔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그런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그전에도 한국어 교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 적이 있었다. 대학생 때 난민지원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때, 불어권 국가에서 온 난민 분들의 한국어 수업을 지원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따로 계셨지만 옆에서 나도 함께 수업을 들으며 사소한 일들을 도와드렸고, 수업시간 외에도 그분들과 종종 한국어로 대화하며 연습을 도왔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 공부가 필요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건 무척이나 보람찬 일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쯤 학생 때 관심을 가졌던 분야들은 서서히 잊혀갔다. 일단 취업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취업이라 함은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에 맞추어 기업들에 맞는 인재상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소서를 꾸며나갔다. 결국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건설회사에 입사하면서, 작가라든가 기자라든가 한국어 교사라든가 하는 과거의 꿈들은 희미해져 버렸다. 그런데 네팔 여행이 다 꺼진 불씨에 불을 지핀 것이다.
‘한국어 교사가 될 수 있다면, 네팔뿐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을 거야.’
당시 나는 네팔뿐 아니라 전년도에 다녀온 몽골 여행에서도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 우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자격증을 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어교원자격증은 1급부터 3급까지 있는데, 1급은 2급을 보유한 상태로 일정 기간 경력을 채워야 하므로, 처음부터 바로 딸 수 있는 건 2급과 3급이었다. 3급은 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딸 수 있고, 2급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을 전공으로 학위를 이수하면 딸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왕 따는 거 2급으로 준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2년간 온라인 학생이 되었다. 퇴근하면 수업을 듣고, 주말에도 수업을 듣고, 과제도 제출하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봤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내용은 심화되었다. 직장생활과 온라인 학습을 병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어 문법은 파고들수록 머리가 아팠고, 각종 교수 이론들과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알아야 하니 공부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종종 휴학(?)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네팔을 기억했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공부였으니까. 내가 재미로 시작한 일이, 먼 훗날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총 4학기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학기는 퇴사 시점과 맞물렸다. 어쩌면 덕분에 퇴사를 조금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나는 회사 취직 외에도 한국어 교사라는 기회도 노려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반전은 없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다시 회사에 입사했다. 한국어 교사로 몇 군데 지원을 해보기는 했지만, 경력이 없어서인지 결과는 모두 서류 탈락이었다. 실제로 공고문들을 보고 있으면 ‘죄다 경력자만 뽑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곤 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준비해 둔 건 언젠가 꼭 써먹을 일이 생긴다.
실제로 지난해 뉴질랜드에 사는 친구의 소개를 통해 뉴질랜드 작가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분이었는데, 워낙 한국 문화와 드라마에 관심이 많으셔서 남편 분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을 온 것이었다. 친구는 내게 한국어교원자격증이 있다는 걸 알고 소개해주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 등을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나는 만나기 전에 오랜만에 한국어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참고하면 좋을 주요 메뉴와 식당에서 쓸 수 있는 문장들을 정리했다. 작성하면서 재밌었고, 그걸 보고 기뻐한 그분을 보며 더 마음이 뿌듯했다. 함께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식당에 가서 불고기와 양념갈비도 먹었다.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한국에 대해 이야기해 드렸고, 그분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내게 여러 가지 팁을 주셨다. 이후 그분이 쓰신 소설을 읽고 지금까지도 메일로 간간히 연락하고 있다.
자격증이 없었다면, 뉴질랜드 작가님과의 인연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헛된 경험이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네팔 여행이 나로 하여금 한국어교원자격증을 따게 했고, 그 자격증이 새로운 인연을 가져왔다. 관심 있는 일은 일단 해두면, 알지 못했던 세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펼쳐진다.
2년간 퇴근 후의 휴식과 주말의 여유와 맞바꾸며 이루어낸 것인 만큼 내게는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소중한 자격증이다. 직장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지금은 당장 한국어 교사를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작은 것에서 시작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이주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들을 위해 실제 꼭 필요한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봉사자가 되어보고 싶다. 내가 경험으로 얻은 기회와 기회를 통해 얻은 경험이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