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발레
직장생활 2년 차, 싱가포르로 출장을 갔다. 갈 때는 텅 빈 캐리어로 갔지만 올 때는 들고 와야 하는 문서가 한가득이었다. 수하물 기준 중량인 23kg이 혹시나 넘지 않을까 걱정하던 찰나, 호텔 객실 안에 체중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짐을 실어보니 22kg이었다. 체중계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도 올라가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몸무게에 5kg을 더한 숫자가 나왔다. '그렇다면 실제로 캐리어는 17kg 안팎이겠구나' 하고 안심했다. 그런데 그날 밤 공항에 가서 컨테이너 벨트에 짐을 올리자, 정확히 22kg이 빨간 글씨로 찍히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틀어박힌 지 1년 반, 나는 5kg이 쪘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딱히 몸무게에 신경을 쓴 적도 없었고, 딱히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없었다. 학생 때는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아마 그렇게 걷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어느 정도 소모되었던 것 같다.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낄 일도 없었다... 어렸으니까.) 그런데 직장인이 되니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데다, 첫 직장은 심지어 집에서 코앞이라 걸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먹는 양은 그대로였으니, 체지방이 한껏 늘어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비로소 ‘살기 위해 운동한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짜고짜 아무 운동이나 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줄넘기도 10분만 하고 나면 금방 지쳤고, 주변 사람들이 많이 하던 요가와 필라테스 역시 동작을 따라 할 때마다 아프기만 하고 보람은 없었다. 운동하면서 몸무게가 줄어들거나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면 좀 더 꾸준히 해봤을 텐데,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결국 운동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두세 달 해보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운동은 역시 재미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집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억지로 설렁설렁하던 어느 날이었다.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우연히 문화센터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성인발레 / 주 1회 / 3개월 / 9만 원> (몇 년 전 가격이라 더 저렴하다). 아주 어릴 때 투투를 입고 머리에 리본을 꽂고 발레를 해봤던 기억은 있지만, 성인발레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면서 관심이 생겼다.
'그래, 한 달에 3만 원인데 고민할 게 뭐 있어?'
집구석에 처박혀있던 레깅스에 티셔츠를 꺼내 입고 첫 수업에 갔다. 수업 당일 선생님으로부터 연습용 발레슈즈를 구입해 신고는, 낯선 구령에 맞춰 신기한 동작들을 따라 했다. 30분 정도 스트레칭하고 30분 정도 발레 동작들을 배웠다. 워낙 몸치에 박치여서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이어지는 춤 동작을 하는 운동이다 보니 막연하게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 했던 요가나 필라테스보다는 재미있었다.
문화센터는 정식 학원도 아니고 수강생들의 연령대도 낮지 않다 보니 수업이 주로 스트레칭과 쉬운 동작들 위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더 쉽게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처음 해보는 운동을 이렇게 가볍게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재미있어서 집에서도 꾸준히 동작들을 연습해보곤 했다. 몸이 점점 개운해졌고, 계속 고개를 들고 다리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으니 굽은 어깨도 조금씩 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정도 발레를 꾸준히 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가면서 자연히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나는 클라이밍에 푹 빠져 있었으나... 어느 날 벽에 붙어있는 내 몸이 너무 뻣뻣하게 느껴졌다. 클라이밍에서도 유연성은 꽤나 중요하다. 하지만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단순한 스트레칭을 반복하자니 재미가 너무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발레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운동은 이렇게 언젠간 다시 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정식 학원에서 성인 초급반을 등록했다. 문화센터의 2배 되는 가격인 만큼 더 꼼꼼하게 배울 수 있었다. 난이도도 더 높았고, 운동 강도도 더 셌다. 문화센터가 스트레칭 위주였다면, 이번에는 발레 동작들을 정확하게 익히는 것이 수업의 주된 목표였다. 선생님은 힘을 줘야 하는 부위와 움직여야 하는 부위들을 정확하게 짚어주셨고 동작을 세세하게 수정해 주셨다. 그래서 문화센터 수업 때보다, 심지어 때로는 클라이밍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땀을 흘렸다.
“손끝을 뻗으라고 해서 정말 손끝만 뻗으라는 건 아니에요. 어깨부터 쭉 힘을 같이 줘야 동작이 완성되는 거예요.”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을 백조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백조는 호수 위를 고요히 미끄러지지만, 실제로 수면 밑에서는 발을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발레 동작들도 마찬가지다. 가볍고 우아한 동작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동작들만 어설프게 따라 하면 절대 발레 특유의 몸짓이 나올 수가 없다. 손끝을 최대한 멀리 뻗으려면 어깨에서부터 팔을 거쳐 손까지 정확한 자세를 취해 팔 전체에 힘을 주어야 하고, 발끝을 멀리 들어 올리려면 허벅지부터 정확한 방향을 잡아 적당한 타이밍에 힘껏 뻗어야 한다. 다른 동작들도 마찬가지다. 올바르게 서 있기 위해서도 머리, 어깨, 허리, 엉덩이 모두 적당한 힘을 주어야만 한다. 고개만 치켜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요가와 필라테스를 금방 그만둔 건, 그저 흉내만 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제대로 된 사전 정보도 없이 대충 시작했던 나는 그 어디에도 진심이 아니었다. 음식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으면서, 운동한 지 10분이 지나면 힘들다고 쓰러지면서, 요가 동작을 엉성하게 따라 해 보는 걸로 몸이 건강해질 리가 없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 마음가짐부터 필요하다. 퇴근 후 나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마음, 조금 힘들더라고 참고 기꺼이 노력해 볼 마음. 막연하게 ‘운동해야지’ 싶어서 해본 요가나 필라테스와, ‘꼭 이게 해보고 싶어서’ 한 발레와 클라이밍은 그 시작부터가 달랐다.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활동들을 할 때는 조금 더 끈기가 생겼고, 그러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재미가 있으니 나만의 목표들이 생겼고, 목표들이 생기니 그걸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고 싶었고, 어제보다 허리를 조금 더 뒤로 젖히고 싶었다. 올바른 동작을 만들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게 되었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손을 합장한다고 요가가 아니듯, 예쁜 스커트를 입고 눈에 보이는 동작만 대충 따라 한다고 발레가 아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표면만 따라 해서는 원하는 바를 얻을 수가 없다.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위해 진심을 다해야 한다. 변화를 만들기 위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노력하지 않는다면, 주변 환경이 아무리 다채롭게 변해가도 나는 여전히 어제 그 자리에 머물러있게 될 것이다.
가장 힘들게 온몸에 집중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발레 동작이 나온다. 매우 당연한 논리를 내 몸을 통해 뒤늦게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발레를 시작한 이후 나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 내가 어깨에서부터 진정으로 힘을 주고 있는지, 아니면 손끝만 대충 뻗고 있는지를. 언제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