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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Oct 26. 2023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이 얻은 행운들

캄보디아 여행 2 - 앙코르와트에서 일출을 보기까지

우기여도 ‘그저 운에 맡기겠다’면서 내 일정에 맞추어 여행을 계획하긴 했지만, 나는 일출이 정말로 보고 싶긴 했던 모양이다. 첫날 새벽 천둥소리와 번쩍이는 번개에 놀라 잠에서 깬 뒤, 아쉬움 때문인지 쉽사리 잠에 다시 들지 못했으니까.


여행 출발 전 일기 예보에 따르면 우리가 시엠립에 머무는 내내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친다고 했다. 그래서 출국 당시에는 일출에 대한 기대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하늘이 맑았고 구름도 적당히 예쁘게 떠 있어, 살짝 기대를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새벽 3시 30분, 그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소음에 잠이 깼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우르르 쾅쾅 거리는 천둥, 거기다 어두운 호텔 방 안을 완전히 밝혀버리는 번개까지 더해지니 야속했다. 이대로라면 일출은커녕 그냥 돌아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캄보디아는 우기여도 비가 하루종일 내리지는 않고 1~2시간 쏟아지고 그친다고는 했지만, 짧은 시간이어도 이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지는 건 줄은 몰랐다.


전날 저녁, 공항


물론, 나에게는 아직 시엠립에서의 아침이 두 번이나 더 남아있었다. 오늘 일출을 보지 못하더라도 내일 다시 시도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휴가지에서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매일 아침 이렇게 비가 온다면?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의 여유로운 마음은 어디로 가고, 나는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4시 반쯤 되니 빗소리가 드디어 조금 잦아들기는 했으나, 여전히 일출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비가 그친다고 해도 분명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미리 예약한 일출 투어를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일단 밖으로 나갔다. 가이드를 만난 4시 45분, 빗방울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우기인 거, 다 알고 왔으니까.'


새벽부터 귀를 괴롭히던 비를 드디어 실제로 마주하니, 오히려 요동치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캄보디아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모든 걸 다 감수하고 오기로 한 벅찬 여행, 고작 전날 하늘에서 본 그 작은 희망으로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오전을 보낼 이유는 없었다.


내가 일출을 보는 것이 과연 당연한 일이던가? 한 해동안 내가 일출을 보기 위해 나가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하루 있을까 말까 하다. 그 일 년 중 하루 있는 날에 환상적인 일출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할 수가 있나? 심지어 평생 딱 한 번 방문한 앙코르와트에서, 오자마자 일출을 보겠다고 하다니.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날씨와 구름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일은 당연하지 않다. 그리고 그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날을 내가 우연히 선택하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일출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캄보디아 여행이 좋았다면 언제든지 다시 와서 보면 된다. 만약 여행이 생각보다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는다면 일출을 보지 못해도 특별히 더 아쉬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더 편해졌다.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차를 타고 약 15분 뒤 (거리는 약 5km 남짓.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오래 걸릴 뿐) 매표소에 도착했다. 우산을 펼쳐야 하나 고민하며 차문을 여는데, 공기는 물론이고 땅이 완전히 말라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도 보이고 별도 보였다. 구름이 거의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이 기적적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숙소 동네와는 완전히 딴 세상에 나는 바로 매표소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멈칫거렸다. 시엠립은 사실 국지성 호우가 어마어마한 곳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매표소에서 앙코르와트까지는 약 7km, 또다시 차로 15분. 앙코르와트 사원은 숙소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역시나, 앙코르와트 입구의 땅도 모두 말라 있었다.


어둠을 뚫고 걸어가 보니 눈앞에는 검은 실루엣의 앙코르와트 사원이 펼쳐졌다. 위로는 구름이 꽤 무겁게 앉아있었지만, 그 사이에 일출을 볼 정도의 공간은 충분했다. 원래 노을도 일출도 하늘에 구름이 조금 있어야 더 예쁜 법이다. 무겁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앙코르와트 앞 연못에 서서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마음은 기약 없는 소망이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기다림이었다. 태양은 시간이 되면 뜰 것이고, 구름이 없는 틈 사이를 비집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사이 짙은 남색 하늘은 자줏빛이 되었고, 자줏빛은 이내 주황빛이 되었다. 주황빛은 점점 한 곳으로 모아져 작게 짙어지더니, 그곳에서 이내 노란빛을 뿜어내는 태양이 올라왔다.


그건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앙코르와트에 비가 내리지 않은 것도, 하늘 색감이 예쁘게 바뀌어간 것도, 태양이 사원 옆에서 올라온 것도,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굉장한 행운이 어우러져야만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새벽 내내 바랐던 행운을 얻었다. 어쩌면 오히려 오지 않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 행운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내가 그 자리에 서서 할 수 있는 건 가슴 깊이 감사하는 일뿐이었다. 앞으로 찾아올 모든 알 수 없는 행운을, 더 이상 가볍게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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