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위에선 에펠탑이 안 보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안에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안 보인다. 그래서 그 도시의 랜드마크 전망대는 한 번쯤 가보기는 하되 즐겨 찾는 편은 아니다. 도시의 풍경을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가장 핵심이 되는 랜드마크는 볼 수 없으니까.
산은 다른 랜드마크와는 다르다. 산은 대개 그 산을 보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된다. 멋진 절벽이든 계곡이든, 산 위에 서 있는 정상석이든, 그 산을 직접 등반해야 산속의 멋진 광경들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고성 금강산이 그랬다. 설악산 가까이에 서 있는 탓이다. 금강산 화암사의 등산 코스는 그 자체보다도 신선대 (성인대) 위에서 바라보는 설악산 울산바위 전망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고성 금강산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물론 울산바위는 특별하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될 만큼 워낙 특이하고 멋진 경관을 선사하는 기암이니까. 그 옆에 서 있으면 그 어떤 산도 주목받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산의 풍경을 보기 위한 발판쯤으로 여겨지는 고성 금강산은, 그 유명한 1만 2천 봉 금강산 줄기의 일부다. 그래서 이름 또한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금강산 화암사는 남쪽 기준으로 봤을 때 금강산의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어, 금강산의 첫 암자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금강산 비로봉에서는 꽤나 떨어져 있지만, 같은 산 줄기라는 사실은 꽤나 멋지지 않은가!
수바위
울산바위를 볼 수 있는 신선대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금강산 화암사에서부터 시작되는 등산로 자체도 참 멋있었다. 화암사에서도 잘 보이는 수바위는 그 자태가 어디서 보아도 근사했다. 화암사에수바위를 조망하며 차를 즐길 수 있는 찻집도 있을 정도다.
등산로를 아주 조금만 걸어 오르면 그 수바위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고, 거길 지나면 또 시루떡 바위도 만날 수 있다. 오래전 지팡이로 세 번 치니 두 명 분의 쌀이 나왔다는 수바위는, 누군가 욕심을 부려 여섯 번을 치니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전설일 뿐이지만 근처에 시루떡 바위도 있으니 더 재미있게 다가왔다.
바위들을 모두 지난 뒤 계속해서 올라가는 계단길도 지루하지 않다. 곧게 뻗은 나무들도 예뻤고, 마침 시기가 시기인지라 주황빛으로 물든 단풍들도 좋았다. 철제 계단이 아닌 나무로 된 계단인 점도 왠지 따뜻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화엄사에서 신선대로 오르는 길
사실 오만 군데 다 감정이입하는 나는, 전망대로 이용되는 듯한 금강산에게 조금 미안했다. 나 또한 이날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움보다는, 날씨가 흐려서 울산바위를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산에서 볼 수 있는 그 다른 풍경들 또한, 금강산의 매력일 것이다. 어느 정도 오르고 나면 전망이 탁 트여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것도, 거기서 조금 더 오르면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보이는 것도. 다른 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금강산에서만 가능한 풍경일 테니 말이다. 다른 전망을 보기에 좋다고 해서, 금강산 자체의 매력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좌) 신선대 (성인대) | (우) 멀리 보이는 바다
어쩌면 울산바위를 보러 왔다가 화암사나 수바위의 매력에 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신선대의 멋진 모습에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나처럼.그런 방식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움이 알려질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꼭 금강산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도, 그걸 위해 일단 금강산을 찾는 이들이 많다면, 그것대로 금강산에는 좋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내가 금강산을 다시 찾을 때면, 울산바위만을 보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날씨가 맑은 날, 맑고 푸른 하늘 아래 금강산의 수바위도, 계단길이 끝나는 곳의 신선대도, 내 여행의 목적이 될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