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을 몇 년에 한 번 정도 보던 때에는 뮤지컬을 보러 가는 일이 꽤나 단순한 일이었다. 비록 티켓팅은 늘 치열했어도, 보고 싶은 작품이 생기면 예매를 하고 공연일에 보러 가면 그만이었다. 예매일과 공연 당일, 딱 이틀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아주 열렬히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뮤지컬 역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이제는 이전보다 훨씬 꼼꼼하게 준비와 정리를 한다.
<뮤지컬의 뮤> 10화 기념, 내가 뮤지컬을 보러 가기까지 하는 일들을 한 번 정리해 보았다. 뮤지컬을 평소에 즐기는 분들은 아마 공감할 것 같고, 관심은 있지만 본 경험이 많지 않은 분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모은 티켓 중 일부
1. 작품 예상
예전에는 보고 싶은 작품이 생기면 보러 갔지만, 이제는 '보고 싶은 작품이 생기면'이라는 전제가 없어졌다. 물론 관심 없던 작품이 뒤늦게 좋은 후기들로 인해 보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몇 달 전 혹은 1년 전부터 기다린다. 연말연초가 되면 앞으로 1년간 예정된 뮤지컬 일정들이 속속들이 공개되므로, 관심 있는 작품들을 기억해 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뮤지컬 작품 일정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대표적으로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각 제작사들이 직접 공개하는 것이다. 제작사별로 연말연시가 되면 그 해에 공연할 작품 리스트를 쭉 공개하곤 한다. 그게 제일 정확하고 찾아보기도 쉽다.
두 번째로는 공연장들의 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대개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한참 전부터 공연장 대관 예약을 해야 한다. 각 공연장 홈페이지의 캘린더를 보면 간혹 예약되어 있는 공연명이 공개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일일이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방법이고, 어쩌다 발견하게 되는 경우 기분 좋은 방법 정도가 되겠다.
세 번째로는 오디션 공고가 있다. 공연하기 전에 주조연 배우 및 앙상블 오디션 공고가 올라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오디션 공고에는 공연 시기도 함께 적혀 있기 마련이다. 이것 역시 내가 배우지망생이 아닌 이상 일부러 찾아내기는 쉽지 않지만, SNS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역시나, 이중 첫 번째가 가장 정확하다. 제작사에서는 확정된 것만 공지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일정이 변경 또는 취소될 여지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작품 선택
공연 시작 2~3개월 전쯤에는 캐스트가 공개된다. 보고 싶어서 기다렸던 작품들도, 공개되는 캐스트에 따라 최종적으로 볼지 말지를 확정 짓는다. 대부분 특정 배역에는 해당 배역으로 유명한 배우들이 하나쯤은 있어서, 보고 싶은 작품에 보고 싶은 캐스트가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평소 좋아하는 배우나 보고 싶었던 배우가 캐스팅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연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관심 배우가 없더라도 작품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공연을 다 볼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기간에는 한 가지 공연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므로.
3. 일정 선택
캐스팅이 공개되면 곧 첫 티켓 오픈 공지가 올라온다. 덩달아 캐스팅 스케줄과 좌석배치도, 가격도 함께 공개된다. 공연에 따라 한꺼번에 공개되기도 하고, 순차적으로 다른 날에 차례차례 공개되기도 한다.
우선 내가 가장 보고 싶은 배우 혹은 배우 조합을 정해놓고, 캐스팅 스케줄을 찬찬히 살핀다. 가능하면 개막 첫 주에 내가 가능한 날에 내가 원하는 캐스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다음으로 최대한 빠른 날을 정해둔다. 만약 같은 시기에 보고 싶은 공연이 여럿 있을 경우, 달력과 엑셀 시트를 펼쳐놓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보아야 할 때도 있다.
4. 좌석 선택
일정을 정하고 나면, 최적의 자리를 찾을 차례다. 같은 공연장에서 이루어졌던 다른 공연들의 후기와, 같은 공연의 이전 후기들을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 가며 찾아본다. 공연장별 시야 후기를 모아 볼 수 있는 사이트도 알차게 활용한다.
꼭 앞쪽에서 보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앞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그렇지 않다면 가성비가 괜찮은 열을 몇 개 정한다. 앞에 난간으로 인한 시야 방해만 없다면, 보통은 R석 혹은 S석이 시작되는 열이 가성비가 가장 좋다.
그다음에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이 나을지를 찾아본다.주요 장면 혹은 특정 배우를 보기에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웬만하면 중간 좌석의 시야가 가장 좋겠지만, 나는 통로석을 선호하는 편이다. 인터미션 및 공연 종료 후 이동이 쉽기도 하고, 앞사람으로 인한 시야 방해를 절반이라도 방지하기 위함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 최소한 한쪽이라도 앞에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내가 쓸 수 있는 할인이 없는지 열심히 찾아본다.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으면 계획보다 좋은 좌석으로 잡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은 안타깝게도 할인 옵션들이 많이 줄어드는 추세다.) 그렇게 원하는 좌석을 1안부터 5안 정도까지 정해둔다.
5. 티켓팅
가장 중요한 티켓팅을 할 차례다. 앞서 했던 모든 고민들은 티켓팅에 성공하지 않으면 무의미해진다. 대부분의 공연은 평일 근무시간에 티켓 오픈을 한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갑자기 미팅이 생기거나 하면 예매가 불가하다. 그래도 운 좋게 아무 일이 없는 시간이라면, 조용히 예매창을 열어 나만의 전쟁을 벌인다.
운 좋게 단번에 원하는 좌석 예매에 성공한다면, 그날은 그걸로 축제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날 밤 또는 아침에 취소표를 잡는 이른바 '취켓팅'에 도전한다. 티켓 예매 시 무통장입금을 선택한 사람들이 입금을 하지 않으면, 예매처마다 특정 시간에 그 표들이 다시 열린다. 취켓팅도 실패하면 2~3일 후 아침 8시에 '예매대기' 전투를 벌인다. 예매 대기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 아닌 경우에는 수시로 예매창을 들락날락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매대기를 제공하는 경우라고 해서 반드시 더 수월한 건 아니다. 예매 대기는 결국 먼저 예매한 누군가가 취소해야 하고 나보다 먼저 그 자리를 대기한 누군가가 포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예매로 이어지기 쉽지만은 않다. 대기하는 좌석 위치가 좋을수록 취소할 확률이 적으므로, 예매 대기를 할 때는 기대치를 조금 낮추어 적정한 좌석에 대기를 걸어둔다.
6. 공연 예습
티켓 구입에 성공하면, 공연을 예습한다. 나는 스포일러를 미리 알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1막 앞부분의 내용 정도는 미리 파악하고자 하는 편이다. '스포 없음'이라고 적힌 후기들만 열어서 줄거리를 미리 확인하고, 등장인물이 많은 경우에는 인물 소개 글들도 살펴본다.
사실 내가 이렇게 미리 알아보고 가려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몰라도 스포를 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간혹 음향이 좋지 않거나 배우들의 발음이 좋지 않으면 줄거리 따라가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1막에서 헤매다가 결국 인터미션 때 다급하게 검색을 하고, 그러다 얼떨결에 2막을 스포 당하는 불미스러운 경우가 생긴다. (실제 경험담이다.)
7. 공연 전날 준비
공연 전날에는 필요한 할인 증빙을 미리 체크해 둔다. 조기 예매 할인이나 특정 회차 할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할인은 증빙자료를 보여주어야 한다. 재관람 할인을 적용받았다면 이전에 관람했던 티켓을 실물로 챙겨야 하고, 연령 할인을 받았으면 신분증을, 수험표 할인을 받았으면 수험표를 챙겨야 한다. 증빙을 챙기지 못하면 현장에서 정가의 차액만큼을 지불해야 한다.
할인 증빙 외에도, 앞쪽 자리를 예매한 것이 아니라면 오페라글라스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앞자리를 예약했다면 쓸 일이 거의 없으나, 뒷열이라면 당연히 오페라글라스가 유용하다. 배우들의 표정과 디테일한 소품들을 보기 위함이다.
그밖에는 물도 한 병 챙기고, 추운 공연장이면 겉옷도 하나 들고 가는 것이 좋다. 크지 않은 가방에 짐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가방을 챙겨본다. 공연장에서는 부피가 큰 짐을 맡아주기도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짐을 찾는 것도 귀찮은 일이므로 가급적 나의 작은 자리에서 직접 들고 있을 수 있는 정도로 가볍게 짐을 꾸린다.
공연 앞뒤로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라면, 공연장 근처 맛집도 미리 찾아본다. 집에서 출발 또는 회사에서 퇴근하는 시점부터 공연을 보고 난 후까지, 공연 당일의 전체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8. 공연 당일
드디어 공연 당일. 나는 공연장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다. 보통 대극장은 공연 1시간 30분 전부터 티켓을 수령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것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해 그날의 캐스팅보드와 포토존을 찍어놓고 티켓 수령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받는 것을 좋아한다. 늦게 오면 티켓 수령 줄도, 캐스팅보드 및 포토존 촬영 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할 일은 빨리 끝내놓고, 이후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여유를 즐기면서 공연 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퇴근 후 저녁에 보러 가는 날은 어쩔 수 없이 그 정도의 여유를 쓰지 못한다. 특히 모두가 퇴근하고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기 때문에 대기줄은 더 치열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단축하려 애쓴다. 어느 역에서 내려서 어느 출구로 나가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몇 번씩 되뇐다. 내리자마자 기계처럼 움직여, 빠르게 티켓을 수령하고는 그날의 캐스팅보드를 찍는다.
소극장 공연들은 공연 1시간 전 혹은 30분 전부터 티켓을 수령할 수 있다. 소극장 공연들은 대극장 공연에 비해 관객 수가 적은 편이므로, 조금 늦게 가도 아주 붐비지 않는다. 나는 대개 30분 전까지 맞춰가는 편이다.
9. 좌석 착석
공연장 좌석에 착석하는 시간은 그날의 좌석에 따라 다르다. 나는 주로 통로석에 앉기 때문에, 보통 공연 시작 5~10분 전쯤에 들어가는 편이다. 일찍 앉아있으면 나보다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계속해서 피해 주어야 하므로 귀찮다. 반대로 안쪽 자리에 앉아야 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피해줄 필요가 없도록 가급적 15분 전에 착석해있고자 한다.
자리에 앉아서는 오페라글라스의 초점을 맞추고 (요즘은 자동초점 오페라글라스도 사용하고 있는데, 초점 맞출 필요가 없으므로 편리하다.), 공연장의 온도에 맞추어 겉옷을 꺼내거나 가방에 넣어둔다. 휴대폰은 비행기모드와 무음 설정을 하고 가방에 넣는다.
10. 인터미션
대극장 공연들은 대부분 15~20분 간의 인터미션이 있다. 1막이 끝나자마자 우선 빠르게 화장실에 다녀온 뒤, 1막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간략하게 메모한다. 좋은 가사나 대사 같은 건 이때 빠르게 메모하지 않으면 나중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이때도 완벽하게 복기해 두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1막에서 이해 못 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면 스포를 최대한 피하며 빠르게 찾아 훑어보...지만, 6번에서 말했듯 이러다가 스포를 당하기 십상이므로 최대한 자제한다.
11. 공연 후기 메모
공연이 종료되면 후다닥 메모장을 열어 그날의 감상을 적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생각나는 것들을 아무거나 열거해 둔다. 2막에서 기억하고 싶은 대사나 가사, 혹은 인터미션 때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1막에 대한 부분들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메모해 둔다. 바로 남기지 않으면 소멸되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집중해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12. 후기 정리
집에 돌아와서는 메모한 것들을 글로서 정리해 본다. 그렇게 쓰고 정리하면 좀 더 정돈된 후기를 만들 수 있다. 작품의 줄거리나 연출 등에 대한 후기와 출연 배우들에 대한 후기를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는다. 찍어온 사진들도 한 번씩 정리해 본다.
13. 음원, 영상, 후기 찾아보기
좋은 공연은, 한동안 일상 속을 침투한다. 좋아하게 된 넘버들은 음원이 있다면 음원사이트, 그렇지 않다면 제작사가 공유해 준 공연 영상들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서 배우들이 부른 영상들을 찾아 반복해서 보고 듣는다. 메인 넘버가 아니라면 (때로는 메인 넘버여도) 이도 저도 없는 경우도 많으니, 뮤지컬 '덕질'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며 이 사람은 어떻게 느꼈는지, 다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시야와 음향이 어땠는지, 다른 배우들은 어떻고 다른 날에는 어떤 애드리브가 있었는지 등을 찾아보기도 한다. 공감이 가는 후기는 나 또한 그 순간에 다시 되돌아간 느낌을 준다.
14. 다시, 티켓팅
정말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면 티켓을 다시 예매한다. 그리고 위 내용을 또 한 번 반복한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하나의 작품을 보고 오기까지 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다.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챙겨가며 고민의 시간도 기다림의 시간도 모두 즐길 수 있다.
공연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기다림도 3개월, 보고 나서 그리워하는 시간도 3개월 혹은 그 이상인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공연에 대한 기대감과, 몇 달 전 다녀온 공연에서 느꼈던 설렘을 동시에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