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전시회에 가기 전에 꼭 확인하는 것이 생겼다. 실제로 화가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인지, 아니면 미디어 아트 전시인지. 요즘은 그림을 직접 전시하는 대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작품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 움직이게 하는 등의 미디어 아트 전시도 흔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유명 가수의 목소리를 AI에 학습시키면 그 가수가 부르지도 않은 다양한 노래를 그 가수의 버전으로 들을 수도 있고, 특정 영화배우의 얼굴만을 이용해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대략적인 구상만 있다면 불과 몇 분만에 소설 한 편이 완성되기도 한다. 예술은 기술로 대체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이전에는 몇 달, 몇 년의 노력이 필요했던 일들이 이제는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있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배경의 전환을 표현하기 위해 일일이 소품과 무대장치를 만들어 공연 중에 재빠르게 장치를 옮기고 제거해야 했다면, 요즘은 스크린 영상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양한 기술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무대가 새로운 볼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사람은 필요하기도,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므로, 공연예술 역시 앞으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질 것이다.
동명의 SF 소설을 뮤지컬화한 <천 개의 파랑>은,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를 상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로봇들이 보편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섬세하고도 화려한 영상미를 잘 활용하는 동시에, 다양한 존재들을 제각각 매력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경마장의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로 시작된다. 기수는 그저 말이 달리게끔만 하면 되는데, 누군가의 실수로 학습용 칩이 심긴 콜리는 다른 기수들과 다르다. 인지 능력이 있어 경마장 직원의 이름도 궁금해하고 자신이 호흡을 맞추어 함께 달리는 말 '투데이'가 행복해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그런 콜리이기에, 혹사당해 관절이 망가진 투데이를 위해 직접 말에서 떨어지는 무모한 행동까지 한다. 그렇게 하반신이 망가진 콜리는, 경마장 근처에 사는 고등학생 '연재'에게 발견된다. 고장난 로봇을 고치는 재주가 있는 연재는 폐기 처리를 당할 위기에 놓인 콜리를 집으로 데려와 다리를 만들어주기로 한다.
나는 스스로 그동안 다양한 뮤지컬 작품들을 접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무대에서의 로봇과 말에 대한 표현은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모든 존재는각기 다른 방식으로 퍼펫과 퍼펫티어(*1)들의 열연으로 완성되었고, 모두인상적이었다.
먼저 투데이는 퍼펫티어 세 사람의 호흡이 대단했다. 퍼펫 형태로 만들어진 말의 안쪽에, 각각 앞발과 뒷발에 두 사람이 들어가 말의 다리를 조종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밖에서 말의 머리를 조종하는 형태였다. 박자와 움직임이 대단히 정교해서, 실제 말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퍼펫티어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다 해도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 다 드러나 보이지만, 가만히 서서 호흡만 하고 있을 때와 먹이를 먹을 때 그리고 달릴 때,각기 다른 섬세한 움직임을 보여주어 감탄이 나왔다.
로봇은 콜리를 포함해 크게 세 가지가 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생존율을 계산하고 사람을 구조하는 '다르파'를 포함해 작은 크기의 로봇을 표현할 때는 강아지 크기의 실제 로봇을 활용했다. 로봇들은 사람이 작동시키는 리모컨을 통해 움직여졌다. 그리고 편의점 도우미 로봇으로 등장하는 '베티'는 사람이 로봇 인형의 탈을 쓴 형태였다. 사람이지만 발걸음이 로봇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콜리는 로봇 인형과 콜리 역의 배우가 나란히 혹은 포개어 서서 모든 장면을 함께 했다. 아무래도 배우만 있으면 로봇인 것이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고, 그렇다고 로봇만 쓰면 대사와 노래에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이런 선택을 한 것 같았다. 혹시 어색할까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로봇 콜리는 검은 옷을 입은 퍼펫티어들과 콜리 역을 맡은 배우의 호흡으로 움직였고, 로봇 콜리가 충분히 표현해내지 못하는 연기와 노래, 그리고 보다 복잡한 움직임들은 콜리 역의 배우가 맡아서 했다. 다른 배우들은 콜리를 대할 때 배우가 아니라 로봇 인형과 시선을 맞추었고, 콜리 역의 배우 역시 말을 타야 하는 등의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몸짓보다는 로봇의 팔다리 움직임을 조절하는 데에 집중했다.
로봇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간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작품의 내용처럼, 무대 위에서도 그러한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무대 위 퍼펫과 퍼펫티어의 교감, 그리고 사람과 기계가 함께 호흡하는 모습은 처음 느껴보는 감동을 주었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 커튼콜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방식이 유지될 수 있을까.언젠가는 실제 로봇들이 사람의 도움 없이 무대 위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부분들도 모두 기계로 대체된다면? 스텝들과 오케스트라, 어쩌면 배우들까지도 모두 기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을까?사람들이 연습하는 데에는 몇 달의 시간이 걸리지만, 기계는 입력만 하면 곧장 공연이 가능하다. 게다가 매번 완벽하게 동일한 공연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빠르고 정확함이 요구되는 세상일수록 효율성이 미덕이 된다.<천 개의 파랑> 속 세상 역시 그렇다. 로봇이 대중화되어, 로봇을 수리하는 것보다 새 로봇을 사는 것이 더 저렴하기에 고장 난 로봇은 금방 버려지는 세상. 사람 기수는 다칠 위험이 있었지만 휴머노이드 기수는 그렇지 않기에, 말들을 더 빠르게 달리게 함으로써 인간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세상. 말들은 더 빠른 속도를 요구받으며 혹사당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말들은 휴머노이드 로봇들만큼이나 소모품이니까.
그러나, 그 속에는 비효율성을 지켜내려는 이들도 분명 있다. 투데이의 상태를 걱정하며 오로지 투데이의 건강과 행복만을 위하는 콜리와, 바로바로 버려지는 고장 난 로봇들을 꿋꿋하게 고쳐주고 다니는 연재와 같은 이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들은 대개 비효율적인 일들이다. 바쁜 출근길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을 사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 동네 길고양이가 잘 있는지 보기 위해 더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는 것. <천 개의 파랑> 속에도 등장하듯이, 구조 로봇이 위험에 처한 사람의 생존율이 1%이니 포기하라고 경고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하러 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효율성보다는 1%에 숨겨진 100%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예술 또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행위다. 그러니 어쩌면 우려대로 무대 위 많은 것들이 기계들로 대체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손길이 요구되는 부분들이 남아있을 거라고 믿는다.우리가 공연을 보러 가는 이유는 효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손길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오차 때문이니까.미디어 아트 전시가 성행해도 작가가 그린 붓질의 흔적을 보기 위해 그림이 직접 걸린 전시를 찾고, 저렴한 음원을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음에도 가수의 숨소리까지 듣기 위해 여전히 콘서트를 찾는 것처럼, 시대가 발전하고 바뀐다 해도 그 대체될 수 없는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 포스터에는, 달리고 있는 투데이와 콜리의 실루엣 뒤로 화려한 색감의 스펙트럼이 있다. 나는 이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 세상에는 점점 더 회색빛이 많아질 테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찬란한 색들의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그 색깔들을 지켜내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이 예술을,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지켜낼 것이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
▷ 개요 :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인 동명의 SF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2024년 서울예술단이 제작하였다. 공식 명칭은 '창작가무극 <천 개의 파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