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생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갔던 헤드윅 콘서트였다. 연극, 뮤지컬, 클래식 연주회 같은 것들은 그전에도 봤었지만, 말 그대로 콘서트라는 이름이 붙은 건 그게 처음이었다. 뮤지컬 <헤드윅>의 극본을 쓰고 영화 버전에서는 직접 헤드윅을 연기하기도 했던 존 카메론 미첼이 내한하여, 당시 국내에서 헤드윅 배역을 맡았던 여러 유명 배우들까지 함께 참여한 공연이었다.
나는 같은 기숙사에 살던 언니들이 보러 간다고 하기에 따라갔다. 그전에 영화를 먼저 봤는데,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게 영화 <헤드윅>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재밌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낯설었던 소재 때문인지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넘버들이 좋아서, 특히 플라톤의 「향연」을 모티브로 한 'The Origin of Love'(*1)가 너무 좋아서, 큰맘 먹고 처음으로 큰돈을 써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정말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왔다.
아주 오랜 옛날, 구름은 불을 뿜고
하늘 너머 높이 솟은 산, 오랜 옛날
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를 가진 사람
하나로 된 머리 안에 두 개의 얼굴 가진 사람
한 번에 세상 보고 한 번에 읽고 말하고
한없이 큰 이 세상 굴러 다니며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 사랑 그 이전
The origin of love
...
나는 기억해
두 개로 갈라진 후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봤어
...
그건 슬픈 얘기
반쪽 되어 외로워진 우리
그 얘기
The origin of love
- 'The Origin of Love' 중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직접 뮤지컬을 보러 가기까지는 시간이 참 오래도 걸렸다. 그건 가슴 아픈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기도 했고, 뮤지컬에 큰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서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주인공 헤드윅과 나 사이에 공감대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콘서트에서는 노래 위주로 즐기면 되지만, 뮤지컬은 노래들이 이야기로 전달되는 공간이었다. 어릴 때 접했던 콘텐츠여서인지, 막연하게 <헤드윅>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을 그어버렸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드디어 뮤지컬 <헤드윅>을 보러 가보니, 작품 속 헤드윅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영화를 처음 봤던 때로부터 십몇 년이 흘렀으니 그 사이에 나도 사회도 많이 변화한 것 같았다. 물론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만든 현장감의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헤드윅>은 주인공 헤드윅이 맨해튼의 한 공연장에서 쇼를 연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극중극(*2) 형태가 되어, 뮤지컬 <헤드윅>의 관객들은 곧 극 중 헤드윅의 맨해튼 쇼를 보는 관객이 된다. 이머시브 공연까지는 아닐지라도, 헤드윅은 1인칭 시점으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호응을 유도함으로써 무대와 관객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없앤다.
헤드윅은 때로는 담담하게 그리고 때로는 격정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미국에 데려가주겠다는 한 미군장교의 말에 불법 성전환수술을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미국에 가서 버림받은 이야기. 이후 매춘과 각종 잡일로 돈을 벌다가 만난 새로운 사랑에게 자신이 만든 노래들만 빼앗기고 또 버림받은,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하지만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내내 우울하지만은 않다. <헤드윅>은 롤러코스터, 혹은 줄다리기 같은 공연이었다. 헤드윅이 유쾌하게 농담을 던지며 욕을 쏘아붙일 때, 또는 록음악을 힘껏 내지르며 객석의 환호성을 유도할 때면, 관객들은 모두 신나게 웃고 열광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이내 헤드윅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며 눈이 그렁그렁해지면, 관객들은 함께 숨을 죽이고 그의 슬픔에 공감한다. 그러다 곧 신나게 손뼉 치고 환호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140분 간 관객들은 다양한 감정을 넘나들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미 헤드윅의 입장에 함께 빠져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드윅의 1인칭 시점은 무대와 관객 사이 보이지 않는 벽만을 없앤 게 아니라, 우리가 '나와는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 벽까지 없앴는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어느새 뮤지컬 공연이 아니라 헤드윅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므로.
그의 아픈 삶의 여정을 함께 돌아보고 나면, 관객들은 비로소 진짜 헤드윅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한 가발과 진한 메이크업에 가려졌던 그의 진짜 모습이 드디어 무대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지 않고도 들려준다. 헤드윅, 아니 한셀은, 그저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한 인물일 뿐이었다고.
주인공의 성별, 성정체성, 나이, 인종, 종교와 같은 건 그 캐릭터의 특징 중 일부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공연에 몰입해 그런 부수적인 것들을 하나씩 지워내고 나면, 그제야 <헤드윅>의 본질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 모두 비슷하게 사랑하고 비슷하게 좌절하며 똑같이 일어선다는 사실을. 그러면 <헤드윅>은 평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관객들이 헤드윅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때, 헤드윅 역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새삼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반쪽을 찾기 위해 자꾸만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동안, 외면하고 잊고 있었던 자기 내면의 모습을. 헤드윅이 공연을 연 것은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끝내 스스로를 이해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은 그것이었다. 더 이상 과거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
그렇게 관객들이 함께 하는 헤드윅의 여정은, 그가 걸어온 지난 시간들뿐 아니라 그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의 시간들까지도 포함했다.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내 주변의 사람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었던 한 사람의 인생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일은 언제나 응원이 되고 위로가 되고 영감이 된다. 때때로 자신을 잃더라도 영영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헤드윅도 괜찮을 거라고, 그 자리에 함께 했던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온갖 아픔과 장애물들을 반복해서 겪으면서도 그 속에서 진실한 무언가를 꾸준히 갈망했던 헤드윅의 인생이, 나는 반드시 해피엔딩일 거라고 믿는다.
[뮤지컬 헤드윅]
▷ 개요 : 헤드윅과 그의 밴드 앵그리인치를 주인공으로 한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로, 1994년 처음 제작되어 나이트클럽 등에서 공연하다 1998년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정식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이후 2014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였고, 같은 해 토니어워즈에서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그중 최우수 리바이벌 상 (이전에 존재했던 작품에 주는 상)과 남우 주연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우리나라 라이선스 공연은 2005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4번 공연되었다.
▷ 극본 : 존 카메론 미첼 / 작곡·작사 : 스티븐 트래스크
▷ 국내 제작사 : 쇼노트 / 국내 연출 : 손지은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The Origin of Love', 'Wig In a Box', 'Wicked Little Town'
▷ 2024년 14연 캐스트 (샤롯데씨어터, 2024년 3월 24일~6월 23일)
헤드윅 역 : 조정석, 유연석, 전동석
이츠학 역 : 장은아, 이예은, 여은
앵그리인치 밴드 - 슈크슈프(기타1) : 이준, 최기호 | 크리츠토프(기타2) : Zakky, 조삼희 | 야첵(베이스) : 이한주, 홍영환 | 슐라트코(드럼) : 최기웅, 전일준 | 미르코(키보드) : 유지훈, 정다운
1) <헤드윅>의 유명 넘버 'The Origin of Love'는, 플라톤의「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기원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 인류는 두 사람이 등을 붙인 모습으로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를 하고 있었는데 신들이 인간의 힘을 경계해 반쪽으로 갈라놓았다. 인간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해지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2) 극중극 : 극 안에 2중 구조로 또 하나의 극의 진행되는 것으로,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