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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Jun 10. 2024

우리에게는 리허설이 없어서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잔뜩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디어 에반 핸슨>을 뮤지컬이 아닌 영화로 먼저 접했다. 그런데 넘버들이 좋았던 것과는 별개로 내용이 와닿지 않았고, 오히려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야기는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고등학생 에반이, 의사의 권유로 매일 자기 자신에게 '디어 에반 핸슨'으로 시작되는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에반은 학교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문제아 코너 머피에게 편지 한 장을 빼앗기고 만다. 며칠 뒤 코너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코너가 죽을 때 그 편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코너 머피의 가족은 그걸 유서라고 오해하게 된다. 졸지에 에반은 코너가 죽기 전에 편지를 남길 정도로 가장 친하고 각별했던 친구가 되어버린다. 에반은 처음에는 진실을 말하려 시도하지만, 머피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이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번 시작된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배경이야 어떻든, 나는 에반의 계속된 거짓말이 불편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휩쓸렸다고 해도, 점점 더 과도한 거짓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쌓여가는 걸 보며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의 메시지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또는 '혼자 아니라는 위로'라고 말지만, 공감하기 어려웠다. 에반이 자신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도, 모두 에반의 거짓말로 인해 에반에게 따스하게 대해준 머피 가족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말에 이르러 에반이 결국 진실을 말하고 사과를 전한다고는 해도, 에반이 그렇게 '자신을 찾아가는' 동안 머피 가족이 입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게다가 머피 가족은 친절하게도 에반의 진실을 숨겨주기로 해, 에반은 사회적 비난도 피할 수 있었다. 거짓으로 이어졌던 머피 가족과의 관계만 원래대로 멀어질 뿐, 에반은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잃는 것도 없다. 오히려 엄마와의 보다 돈독한 관계와 앞으로를 위한 약간의 사회성을 얻었을 뿐.


그래서 나는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에 대한 기대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영화 버전에서 생략되었던 넘버들이 몇 개 있다고는 해도, 줄거리는 동일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넘버들을 듣더라도 결말에 내가 느끼는 혼란은 동일할 터였다.


하지만 막상 뮤지컬로 접한 이야기는 내 예상을 벗어나, 불편함보다 감동이 더 컸다. 영화를 봤을 때와는 달리 펑펑 울기도 했다. 그건 뮤지컬의 현장감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영화에서 생략되었던 넘버들 덕이었다.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넘버들이, 내가 불편해했던 빈틈을 메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에반 불안함과 어색함을 부각해 주는 유명 넘버 'Waving Through a Window'로 시작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에반의 엄마 하이디와 코너의 엄마 신시아가 함께 부르는 'Anybody Have a Map?(누구 지도 있는 사람?)'이라는 넘버로 시작한다. 이 넘버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 두 엄마가 각자 아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함께 노래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는 지도는 없냐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이다. 영화에서는 통째로 생략되었다.


누군가 지도 없나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난 모르겠어
티 나는지 몰라도
나는 그저 아는 척 넘어가

- 'Anybody Have a Map' 중


또 하나는 2막 초반에 등장하는 'To Break a Glove(글러브를 길들이는 법)'라는 넘버인데, 코너의 아빠 래리가 에반에게 야구 글브를 길들이는 법을 알려주면서 힘들더라도 제대로 된 길을 택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저 충분한 시간과 그저 충분한 땀
고통을 참아가며 믿고 기다리는 것
좀 늦더라도, 힘들더라도
그 길이 제대로 된 길

- 'To Break a Glove' 중


이외에도 생략된 넘버는 더 있지만, 나는 최소한 이 두 넘버만큼은 영화에서 제외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넘버들이었다.


모두가 처음인 인생이라, 어른도 무엇이 맞는 길인지 결정하기 어려운 세상. 우리는 각자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조금 늦더라도 결국 올바른 길을 택해 간다면 괜찮아질 거라는 메시지. 내가 영화를 보며 아쉽다고 느껴졌던 지점들이, 이미 이 두 넘버에서 다 해소되었다.


이런 메시지가 전제되어 있었던 거라면, 나는 에반을 이해해 볼 수 있었다.



에반은 모든 면에서 결핍이 있는 캐릭터다. 스스로도, 가족관계도, 친구관계도, 무엇 하나 단단한 것이 없다. 사회성이 없어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고, 좋은 엄마는 있지만 매일 늦게까지 일하거나 공부하느라 에반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주지 못한다. 그런 에반에게 머피 가족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따뜻한 공간을 내어주는 외부인이었다. 그러니 에반은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기대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합리화하면서.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동안에도 에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뮤지컬의 장점은 다른 인물이 대사를 하고 노래를 할 때도 에반의 표정을 계속 살필 수 있다는 것. 에반의 불편한 마음도, 진심으로 머피 가족을 아끼는 마음도, 관객들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 속 다른 학생들은 코너의 죽음을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들기도 하지만, 에반만큼은 언제나 진심으로 머피 가족을 대했다. 에반이 처음으로 느껴보는 낯선 따뜻함이었으니까.


그래서 에반이 비로소 진실을 실토하게 되는 순간은,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아끼는 이들이 상처 입는 것을 본 순간이다. 가지지 못한 다른 가족을 동경하는 모습에 상처받은 엄마, 거짓말이 이어지는 동안 결국 상처를 입게 된 머피 가족.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생각보다 큰 일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진실을 전하는 에반의 모습은, 비록 잘못된 일들이었을지라도 그 마음은 늘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뮤지컬에는 수많은 리허설이 있다. 오케스트라와 맞춰보기 전에 하는 피아노 리허설, 오케스트라와 맞춰보는 시츠프로브(*1), 모든 걸 다 갖추고 하는 드레스 리허설… 이렇게 단계별로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노래도 연기도 연출도 조금씩 수정되어 간다.


하지만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 우리는 모두 연습해 볼 기회도 없이 바로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와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건넨 모든 말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저지른 모든 일들 또한 되돌릴 수가 없다. 테스트 환경이라는 건 없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모든 상처는 진짜다.


그렇지만 모두가 처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대해줄 수 있지 않을까.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지도를 원하고, 올바른 길을 택할 용기를 원하는, 우리는 모두 서툰 사람들이니까.


누구나 처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실수를 저질러도 용기 있게 인정하고, 힘들더라도 결국에는 바로 잡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을 때, 어렵더라도 그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는 것.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한다면, 우리 또한 반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한 번쯤 귀 기울여 들어보아야 한다. 그들의 인생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략된 넘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에반은 결국 먼 길을 돌아 자신의 과오와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 거짓말들처럼 코너와 뒤늦게나마 가까워져 보기 위해 노력한다. 코너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코너가 즐겨 읽었던 책들을 읽는 등 코너의 흔적을 따라가며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건 아마 에반이 반성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에반의 거짓말이 아닌 에반이 자신의 서툰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 그리고 넓은 마음으로 에반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머피 가족의 어려웠을 결정에 집중할 때, 이 작품은 그제야 내 온 마음을 따스하게 적셔주었다.


<디어 에반 핸슨>은 리허설 없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다. 지금 괴로운 일들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작아질 것이라고,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듯해도 주변에는 분명 누군가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잘못한 일들은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으니, 힘들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라고. 그렇게 조금씩 노력한다면, 우리는 매일 점점 나아질 거라고.(*2)


디어 에반 핸슨, 오늘은 멋진 하루가 될 거야!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 개요 : 2015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처음 공연했고, 이후 2016년 오프브로드웨이에, 그리고 2017년부터는 브로드웨이에 공연이 올라왔다. 제71회 토니상에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최고의 뮤지컬상을 포함하여 총 6개 부문을 수상했다.

▷ 극본 : 스티븐 레벤슨 / 작곡·작사 : 파섹 앤 폴 / 연출 : 마이클 그라이프

▷ 국내 제작사 : S&Co / 국내 연출 : 박소영 / 국내 음악감독 : 양주인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Waving Through a Window', 'You Will Be Found', 'Only Us'

▷ 2024년 초연 캐스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4년 3월 28일~6월 23일)

에반 핸슨 역 : 김성규, 박강현, 임규형

하이디 핸슨 역 : 김선영, 신영숙

코너 머피 역 : 윤승우, 임지섭

조이 머피 역 : 강지혜, 홍서영

래리 머피 역 : 장현성, 윤석원

신시아 머피 역 : 안시하, 한유란

재러드 클라인먼 역 : 조용휘

알라나 벡 역 : 이다정, 염희진

스윙: 장경원, 임민영, 김강진, 박찬양



1) 시츠프로브 : 독일어로 ‘앉아서 하는 리허설’이라는 뜻으로, 배우들이 처음으로 음악감독의 지휘에 맞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어보는 리허설이다. 최근 많은 뮤지컬 제작사들이 홍보를 목적으로 시츠프로브 영상을 공개하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이고는 한다.

2) 작품 속 넘버들의 가사를 활용해 적은 문단이다. (지금 괴로운 일들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작아질 것이라고 ('So Big, So Small')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듯해도 주변에는 분명 누군가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You Will Be Found'). 우리가 잘못한 일들은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으니 ('Good For You') 힘들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라고. ('To Break In a Glove') 그렇게 조금씩 노력한다면, 우리는 매일 점점 나아질 거라고. ('Sincerel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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