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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Jun 03. 2024

예측하기 어렵고 혼란스러울지라도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이 작품의 공식 시놉시스에는 이미 결말이 어느 정도 명시되어 있어, 해당 글에도 작품의 결말을 포함하였습니다.


이머시브 시어터 (Immersive Theatre) : 관객 몰입형 공연. 배우, 무대, 관객의 경계를 허물어 전통적인 공연 형태를 깬 장르이다.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거나, 관객들을 공연에 참여시키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곤 한다.


뮤지컬 관람 시에는 지켜야 할 예절들이 있다. 옆사람과 대화하지 말 것, 휴대폰을 켜지 말 것, 지정된 좌석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붙이고 관람할 것. 영화관 예절과 비슷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시야 크게 방해되는 여러 공연장들의 구조적인 문제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볼 수 없다는 장르의 특성, 그리고 소란스러울 경우 공연을 하는 배우들에게까지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더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소위 '시체관극(*1)' 아니라도, 코믹한 작품이 아닌 이상 최대한 조용하고 얌전하게 관람하는 것이 보통 관객 간 예의, 그리고 배우들에 대한 예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머시브 뮤지컬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배우도 관객도 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이머시브 공연. (물론 휴대폰 사용 등과 같은 기본적인 예절은 지켜야 한다!) 관객들이 객석에 들어서자마자 배우들은 살갑게 반겨주며 인사를 건네고, 다짜고짜 하이파이브도 하, 아직 관객이 오지 않은 빈자리에 한 번 앉아보기도 하면서 호응을 유도다.


시작부터 제4의 벽(*2)을 깨부수는 이 작품의 첫 넘버는 무려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넘버였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 중 약 70페이지 남짓의 분량만을 따와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니, 인물들을 줄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것보다는 아예 갑작스러운 전개를 택한 듯했다. 이머시브라 가능한 설정일 것이다.


등장인물 이름 정돈 외워둬
이따 졸지 않으려면!

- 'Prologue' 중


앙상블 외 배역 이름을 부여받은 등장인물이 11명이나 되지만, 작품의 주요 줄거리는 원제인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위대한 혜성> 드러나듯 피에르와 나타샤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고뇌하며 방황하는 피에르와 잘못된 사랑에 흔들려 모든 것을 잃은 나타샤가 각자의 괴로움을 딛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실제로 벌어지는 나폴레옹과의 전쟁보다는, 삶 속에서 각자가 겪는 전쟁에 집중한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길이의 소설 중 극히 일부만을 따왔으니 그 기승전결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는 이머시브 접하기에 충분했다.


<그레이트 코멧>은 공연 내내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배우들은 계속해서 관객들이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했고, 간혹 배우들의 손에 이끌려 무대 위로 올라오는 관객도 있었다. 게다가 무대 위에도 객석이 일부 있어서, 객석들은 무대를 기준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 앉든, 일부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뒷모습만을 보게 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무대의 틀을 깨버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밴드 연주자들 외에, 앙상블을 포함해 배우들의 절반 이상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린, 기타, 아코디언 등 여러 배우들 저마다 악기를 들고 뛰어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피아노가 있었는데, 피아노는 무대감독이 주로 연주했지만 피에르역을 맡은 배우도 함께 번갈아가며 연주했다. 관객과 배우의 경계도, 스탭과 배우의 경계도 모호한,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연이었다.



고대부터 혜성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고 한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다른 천체들에 비해 혜성은 당시의 과학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현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위협적으로 보이는 붉고 긴 꼬리도 부정적인 이미지에 한몫했다. 우연히 겹쳤을 사건들에 근거해, 혜성은 오랫동안 지도자의 죽음이나 전쟁, 전염병 등을 예고하는 부정적인 조짐으로 해석되곤 했다. 소설 <전쟁과 평화> 속 혜성 역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에 대한 징조로 사용되었다.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두려워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대부분은 예측하기 어렵고, 혼란스럽다. 미리 작성된 대본대로 진행되는 삶은 없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엎어지곤 한다. 결국 혼돈을 받아들이고 혼란에 익숙해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향해야 할 목표인지도 모른다. 카오스를 회피하는 대신 인정하고, 오히려 그 흐름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나름대로 구심점을 찾아가는 것.


저 별을 누군가는 두렵다고
세상 끝이라 해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아
난 환희로 가득 차


저 별과 나
마치 하나 된 듯
내 영혼 벅차오르고
밝아오는 내 가슴
다시 뛰네
새로운 삶 향해

- 'The Great Comet of 1812' 중


방황하던 주인공 피에르는 결국 자신만의 구심점을 찾아, 두려움 없이 벅찬 마음으로 혜성을 마주할 수 다. 첫 소개에서 '혼란스럽고 어정쩡한', '돈은 많은데 안 행복한'으로 소개되었던 피에르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지만, 결국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평화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얻는 것이듯, 피에르 역시 괴로운 일들을 겪은 뒤에야 희망을 얻게 된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줄 희망을 발견한 피에르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기에 외부의 혜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그레이트 코멧>은 정형화된 작품들 에서 예측불허로 진행되는, 뮤지컬계의 혜성 그 자체였다. 배우들은 예고도 없이 관객석으로 뛰어들어오고, 갑자기 악기를 들고 연주하며 춤을 추며, '앞쪽'이 정해져 있지 않아 뒷모습만 보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관객들은 평소처럼 정적인 자세를 고수하기보다는 같이 박수치고 환호하며, 각자의 방식대로 공연의 카오스를 다. 무대 속으로 깊숙이 들어 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겪는 방황과 혼란스러움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경험게 된.


그렇게 관객들은 무대의 일부, 공연의 부가 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무대를 떠나는 피에르를 바라보며 함께 벅차오다. 어정쩡하게 머물러있을 것 같던 피에르의 삶에도 새로운 장이 펼쳐질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아직 삶에서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의미가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었다.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방황할라도, 스로를 잃지 않고 중심을 잡는다면 언제나 희망이 있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위대한 혜성'은, 그런 징조였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 개요 :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 중, 제2권 5장에 해당하는 70페이지 분량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뮤지컬. 2012년 오프 브로드웨이(*3)에서 초연되어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러시아 전통 음악과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록,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섞인 성스루 뮤지컬이자 이머시브 뮤지컬이다.

▷ 작곡, 작사, 극본 : 데이브 말로이

▷ 국내 제작사 : 쇼노트 / 국내 연출 : 김동연 / 국내 음악감독 : 김문정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Prologue', 'Dust and Ashes', 'Charming'

▷ 2024년 재연 캐스트 (유니버아트센터, 2024년 3월 26일~6월 16일)

피에르 역 : 하도권, 케이윌, 김주택

나타샤 역 : 이지수, 박수빈, 유연정

아나톨 역 : 고은성, 정택운, 셔누

소냐 역 : 효은, 김수연

엘렌 역 : 전수미, 홍륜희

마리야D 역 : 류수화, 주아

마리 역 : 윤지인

돌로코프 역 : 최호중, 심건우

발라가 역 : 유효진

안드레이 / 볼콘스키 역 : 오석원



1) 시체 관극 : 말 그대로 '시체'처럼 공연을 본다는 의미로, 뮤지컬이나 연극을 볼 때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보아야 눈총 받지 않는다며 관람 문화를 비꼬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 (일부 극성 관객들이 과하게 예민한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생리적으 어쩔 수 없는 기침소리나 움직임, 오페라글라스를 사용하기 위해 올렸다 내렸다 하는 팔 등은 충분히 허용된다.)

2) 제4의 벽 :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공연과, 관객들이 있는 현실 세계를 구분하는 가상의 벽. 일반적인 공연에서는 이 개념이 지켜져서 무대 위 배우들과 무대 밖 관객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별개로 존재한다.

3) 오프브로드웨이 (Off-broadway) : 브로드웨이 외각의 극장 거리. 브로드웨이 극장보다 작은 중소극장들이 많으며, 상대적으로 비상업적이고 독창적이며 예술적 시도를 하는 작품들이 많이 올라오는 편이다. 또한 브로드웨이 극장의 등용문 역할도 하는데,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시작되어 이후 브로드웨이 대극장에 올라가는 작품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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