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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20. 2024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나는, 3년 내내 가장 많이 봤던 프랑스어 콘텐츠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 영상이었다. 프랑스 영화도 드라마도 다 관심 없었지만 뮤지컬만큼은 다행히 재밌었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 이었지만 선생님과 친구들 대부분 <노트르담 드 파리>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걸 더 많이 접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익숙하다는 표현보다는 '질리도록 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영상으로만 수차례 본 것이었기에 현장에서도 한 번쯤은 보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봤다는 생각 때문인지 선뜻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결국 졸업 후 한참이 지나고 질림의 농도가 묽어진 어느 날이 되어서야 한국어 버전 공연을 보러 갔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어느 날이었다. 그 당시 캐스트 중에 알고 본 건 바다뿐이었는데, 사실 그마저도 노래와 연기가 어땠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기억은 대충 찍은 캐스팅보드 사진과 아주 짧고 간결한 한 줄 후기가 전부였다.


'다 잘하고 좋았다'


이미 '질렸다'는 전제를 깔고 대해서일까. 늘 작가가 꿈이었던 사람의 후기가 이게 뭐람. 이 한 줄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분명 재밌게 보았고 마지막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감동도 받았던 것 같은데, 그날 공연장에 앉아있던 기분이 어땠는지, 내 눈앞에서 배우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장면이 좋았고 어떤 넘버가 인상적이었는지 같은 건 하나도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과하게 압축된 한 줄의 후기는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한 어떠한 추억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그렇게 오랜만에 감동을 받았던 순간 또한 금방 옅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때 나에게 뮤지컬이란 일 년에 한 번 보게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것이었다. 보고 나면 '오랜만에 좋은 문화생활 했다' 정도의 마음이었지, 작품에 대해 더 알아보려는 관심이나 다음에는 어떤 배우로 어떤 작품을 볼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만약 당시에 내가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두었다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났을 것이다. 영상 속 오리지널 캐스트와 실제로 본 한국 캐스트는 어떻게 달랐는지, 어떤 배우는 내 취향이었고 또 어떤 배우는 아니었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 오랜만에 <노트르담 드 파리>를 다시 보러 가기로 한 것은, 오랜만에 보게 된 작품에 대한 기대감만큼이나 '나'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관객으로서의 '나'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었다. 뮤지컬에 대해 그때보다는 조금 더 잘 아는 상태에서 보면, 같은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기억될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하게 10년 전쯤 작품을 보셨던 부모님과 함께 갔다. 부모님도 최근 내가 뮤지컬을 많이 보여드리게 되면서 그때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작품들을 보셨기에, 나와 비슷한 변화를 느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 공연은 보기 전의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10년 전과는 달리 각 배역마다 보고 싶은 캐스트가 있었기에, 캐스팅 스케줄을 더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좌석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도 오랜 시간을 들였다. 어떤 배역이 어느 쪽에 자주 서는지, 공연하는 극장은 어느 정도 좌석에 앉아야 시야가 좋을지 등을 미리 찾아보았다.


그렇게 사전조사를 하면서 느낀 건, '아는 것' 외에 '애정'도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미리 찾아보고 관람 준비를 하는 것은, 뮤지컬 관람이 내게 정기적인 취미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도 맞지만, 애초에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아는 것도 많이 생길 것이다. 애정을 담아 보아야 애정이 담긴 준비와 기록도 가능했다.



드디어 공연일이 되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사실 설레는 마음 뒤편 어딘가에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다. 최근 놀랍고 세련된 뮤지컬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렇게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작품을 지금 다시 보면 너무 낡아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재밌어?'


하지만 기우였다. 오래된 작품은 낡게 느껴지지 않았고, 고전적인 매력을 한껏 보여주었다. 관객들을 1482년 파리로 초대하는 첫 넘버 '대성당들의 시대'로 막이 오르자마자 나는 공연에 푹 빠져들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성스루(*1) 뮤지컬로, 대사 없이 쭉 노래로만 진행되는 뮤지컬이다. 아무래도 말로 끊어내는 대사 없이 모든 줄거리가 멜로디 속에 숨은 가사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 큰 집중력을 요한다. 이전에도 비슷한 집중력으로 공연을 봤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더욱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사 하나, 배우의 표정 하나, 댄서들의 엄청난 움직임 하나, 모든 것을 눈과 귀로 진하게 담고 싶었다.


"원래 이런 아크로바틱 댄서들이 있었어? 나는 왜 처음 보는 것 같지?"


공연 후 엄마가 민망한 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과거에도 재밌었다고 말씀하시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최근 본 뮤지컬들 중에서도 제일 재밌게 보셨다면서 배우 칭찬, 연출 칭찬, 아크로바틱 댄서 칭찬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셨다. 나도 대부분 공감했다. '10년 전 봤던 공연은 이거랑 다른 공연이었던 것 같다'는 후기까지도.


동일한 작품, 동일한 구성, 동일한 넘버들임에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이토록 다르게 느껴질 수 있었다. 관심을 담은 시선은 이미 익숙한 작품도 새롭게 사랑할 수 있었고, 애정을 담아서 보면 대상에 대한 관심은 또 한 차례 더 커졌다.


덕분에 이번에는 공연이 끝나고 꼼꼼하게 후기를 남겨두었다. 무대 구성이 어땠는지, 연출이 어떤 것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 어떤 배우들이 좋았는지, 내가 앉은 좌석은 어땠는지. 특별히 좋았던 넘버와 특별히 좋았던 순간들도 잊지 않았다. 볼 때의 즐거움만큼이나, 보고 나서 감상을 적는 즐거움도 컸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사랑하게 되니, 공연 소식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공연을 보고 나서 기록을 남기는 그 모든 과정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뮤지컬도 그렇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 개요 :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프랑스 뮤지컬로, 1998년 초연되고 '첫해에 가장 흥행한 뮤지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20년 넘게 23개여국에서 누적 관객 1,500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성스루 뮤지컬이며,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댄서들의 역할도 매우 큰 편이다.

▷ 작·작사 : 뤽 플라몽동 / 작곡 : 리카르도 코치안테 / 연출 : 질 마으 / 안무 : 크리스티앙 레츠

▷ 국내 제작사 : 마스트엔터테인먼트 / 국내 프로듀서 : 김용관 / 국내 음악감독 : 채임경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대성당들의 시대(Le temps des cathédrales)', '아름답다(Belle)', '괴로워(Déchiré)', '살리라(Vivre)', '춤을 춰요, 나의 에스메랄다(Danse mon Esmeralda)'

▷ 2024년 6연 캐스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024년 1월 24일~3월 24일)

콰지모도 역 : 정성화, 양준모, 윤형렬

에스메랄다 역 : 유리아, 정유지, 솔라

그랭구와르 역 : 마이클 리, 이지훈, 노윤

프롤로 역 : 이정열, 민영기, 최민철

클로팽 역 : 박시원, 장지후, 김민철

페뷔스 역 : 김승대, 백형훈, 이재환

플뢰르 드 리스 역 : 케이, 유주연, 최수현



1)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 :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루어진 뮤지컬로, 일반적인 대사에도 모두 멜로디를 붙여 내내 노래하듯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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