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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13. 2024

명작이 되는 법

뮤지컬 <인사이드 윌리엄>

뮤지컬을 좋아하기 시작하던 때, 초반에는 딱 두 종류의 작품들만 보러 갔다. 하나는 <영웅>, <맘마미아>와 같이 뮤지컬을 잘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작품들, 다른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하는 작품들.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큰 규모로 대극장에서 공연했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상대적으로 소극장 공연을 더 많이 해서 그나마 공연장은 나름 고르게 방문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그건 편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덜 유명한 작품은, 어떤 이유로든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확장된다. 뮤지컬을 즐기면서 내 선택의 폭은 점차 넓어져갔다. 좋아하는 배우가 꼭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를 통해 알게 된 낯설지만 좋았던 작품들을 떠올리며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좁디좁았던 나의 관심은 이 배우에서 저 배우로,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자 <인사이드 윌리엄>이라는 창작 뮤지컬(*1)도 알게 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인 햄릿, 줄리엣, 로미오 사이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작품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된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을, 예전의 나는 무슨 수로 알 수 있었을까. 제목이 생소하면 아예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때에는 알지 못했을 작품이다. 다행히 다른 공연에서 보고 좋았던 배우 한 명이 캐스팅되는 바람에 우연히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거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젠더프리(*2) 캐스트도 있다고 하기에, 한 번쯤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예매를 했다.


명작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공연은,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갑자기 자유의지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맞이한다. '명작 공식'에 집착하던 셰익스피어의 글 속에서 갑자기 '햄릿'은 복수하기 싫어하고, '줄리엣'은 로미오와의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로미오'는 자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명작을 만들고자 하는 셰익스피어의 여정은 험난하다.


명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작의 기준조차 모호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도 수없이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이후 그 작품이 널리 사랑받기 위해서는 만들 때 이상으로 더 많고 복잡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창작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널리 그리고 오래 사랑받으며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 작품의 운명에 따른다.


<인사이드 윌리엄>은 초연 이후 최근 재연까지도 일정한 관객들을 끌어들인 작품이다. 웃음과 감동이 공존한 작품이라 내 기억에도 오래 남아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라이온 킹>이나 <오페라의 유령>과 같이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대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올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품은 화려한 대형 무대를 이용해 웅장함 속 황홀함을 전하고, 어떤 작품은 배우를 한 두 명만 세워 단출하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무엇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세상에 같은 작품이란 없으므로, 모든 작품은 각각의 존재 의미를 가진다. 서로 다른 줄거리와 대사와 넘버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객들에게 다양한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지난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한 해동안 뮤지컬을 최다관람한 관객상을 받은 관객은 한 해 동안 175편을 봤다고 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성공 스토리도 있겠지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잊히는 작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보잘것없는 건 아니다. 작은 작품일지라도 그것만이 담아낼 수 있는 의미가 있다면,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이다.


결국 <인사이드 윌리엄> 속 셰익스피어가 명작을 만들 수 있게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각 캐릭터들이 각자의 존재에 대해 돌아보며 혼란스러워진 무대 위에 등장했던 대사 한 줄이 더 중요했다.


명작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래서 잊혀진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


명작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은 오히려 훌륭한 작품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면 속 진심을 표현하게 될 테니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작가만이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다.


모든 인생은 하나의 작품이다.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일. 어떤 이의 인생은 반복해서 주목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영원히 기억되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죽음 이후에 서서히 잊혀가고 만다. 하지만 잊히는 인생이라고 해서 보잘것없는 인생이 아니다.


내 이야기는, 내 마음에 들면 된다. 진실된 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지닌 의미를 담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인생이 결국 사람들에게 잊히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명작으로 남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여전히 특별할 테니.



[뮤지컬 인사이드 윌리엄]

▷ 개요 : 2021년 초연이 올라왔던 국내 창작 뮤지컬로, 셰익스피어, 햄릿, 줄리엣, 그리고 로미오 단 네 명의 주연 배우와 밴드가 함께 무대에 서는 작품이다. 지난 2023년 재연이 올라왔고, 최근 인천, 논산 등에서 지방 공연도 진행 중이다.

▷ 제작사 : 연극열전 / 작가 : 김한솔 / 작곡 : 김치영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그런 작품, 명작', '달라진 장르', '주인공'

▷ 2023년 재연 캐스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2023년 9월 12일~12월 3일)

셰익스피어 역: 원종환, 최호중, 김아영

줄리엣 역: 이아름솔, 김이후, 김수연

햄릿 역: 임준혁, 임진섭, 정지우

로미오 역: 주민진, 유태율, 최민우



1) 창작뮤지컬 : 한국에서 제작된 뮤지컬을 의미한다. 국내 뮤지컬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창작 뮤지컬' 외에 해외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해 한국인 배우들이 공연하는 '라이선스 뮤지컬'이 있고, 외국인 배우들이 직접 와서 원어로 공연하는 '내한 공연'이 있다.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은 <영웅>, <그날들> 등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작품들이지만, 실제로 대학로 소극장에 올라오는 수많은 공연들은 모두 창작 뮤지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젠더 프리 캐스팅 : 성별의 고정관념을 깨고, 배우의 성별과 상관없이 배역을 맡게 하는 캐스팅. 최근 다양한 공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캐스팅 형태다. <인사이드 윌리엄>에서는 여성 배우인 김아영 배우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을 맡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실존한 남성이지만, 해당 극 중의 셰익스피어는 성별이 중요하지 않아, 전혀 어색함 없이 매력적으로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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