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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06. 2024

뒤따라 가는 게 아닌, 나란히 가는 길

뮤지컬 <멤피스>

앙상블 : 주연 배우들 뒤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배역. 각각의 캐릭터를 맡기보다는 여러 역할을 번갈아가며 맡는 엑스트라에 가깝지만, 무대를 가득 채워주고 화음을 꽉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참고로 앙상블(ensemble)은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함께'라는 뜻이다.


뮤지컬을 보러 가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곳이 대개 세 곳 정도 있다. 한 곳은 티켓 수령을 위한 매표소, 또 한 곳은 공연의 분위기를 녹여놓은 포토존이며, 마지막은 캐스팅보드(*1)다. 우리나라는 한 배역에 두 명 이상의 배우가 함께 캐스팅되는 더블캐스팅(*2) 형태가 대부분이라, 매일 캐스팅보드에 붙여지는 배우가 달라진다. 하지만, 매일 같은 위치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캐스트들도 있다.(*3) 그들은 바로 앙상블이다.


뮤지컬을 아주 즐겨보지 않는 이상, 앙상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는 잘 없을 것이다. 배역 이름 없이 '앙상블'이라는 이름 아래 한 데 묶여 각 배우의 이름만 열거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아주 작은 배역이니까. 나 또한 처음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가 몇 명의 주연 배우들 때문이었기 때문에, 앙상블 배우들은 무대를 함께 만들어내는 배우들 정도로만 여겼을 뿐, 별다른 관심을 둔 적은 없다.


그러다 뮤지컬 <멤피스>를 보게 되었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1950년대 미국, 그리고 그 속의 흑인 음악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주연 배우들이 빛나는 만큼 앙상블도 못지않게 빛이 나는 작품이었다. "ㅇㅇㅇ 배우가 참 멋졌어!"가 아닌, "앙상블이 정말 멋졌어!"라는 후기는 이때 처음 말한 것 같다. 작품 자체가 음악이 주가 되다 보니 앙상블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많이 있던 것도 사실이나, 그렇다 해도 멤피스의 앙상블들은 완벽했다. 소울풀한 노래에서부터 화려한 춤, 맛깔스러운 연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매번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주었다.


<멤피스>를 통해 비로소 느끼게 된 건, 앙상블은 곧 무대라는 사실이었다. 과거에 봤던 공연들도 떠올려보면, 무대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수많은 앙상블들의 역할이 컸다. 앙상블이 배경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면,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결코 빛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앙상블은 주연 배우가 되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라고 생각하곤 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많은 배우들도 지금은 주연 역할을 맡고 있지만, 대부분은 앙상블에서 시작했다. 앙상블 배우들이 경력을 조금씩 쌓다 보면 점차 조연도 맡고 주연도 맡는 것이 뮤지컬 배우가 성장하는 공식 같았다.


<멤피스>에서 펠리샤 역을 맡았던 유리아 배우도 마찬가지의 단계를 거쳐왔다. 그런데 공연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앙상블 시절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에 유리아 배우가 소신 있게 한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좋은 취지로 해주는 질문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현재 앙상블을 열심히 하고 있는 배우들을 생각하면 다소 무례한 질문이 될 수도 있다고.


"저는 한 번도 앙상블을 하면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었거든요. … 조연분들은 무조건 '주연하고 싶어'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을 거라는 마음 자체가 좀 고정관념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너무 행복했거든요."


무대 위에서 주연 배우와 앙상블 배우는 모두 필수적인 존재들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부족하면 공연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앙상블은 주연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역할이다. 왜 앙상블에서 조연을 거쳐 주연으로 가는 길을 모두가 당연히 바랄 진급이라고 생각했을까.


누군가의 행복을 타인이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꿈을 타인이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앙상블들이 그들의 현재를 벗어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대 밖에서만 할 수 있는 오만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린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는 거야. 근데 그게 나쁘지 않아. 각자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건 멋있는 거야.


<멤피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무대 위에 오르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하게 빛나는 이 작품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대사였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이미 앞서 간 길을 뒤따라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의 꿈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각자 다른 길을 걷는 우리는, 서로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란히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각자 어울리는 역할을 맡고,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와 움직임을 보여준다. 내 꿈이 너여야 하고 네 꿈이 나여야 할 이유는 없다. 각자가 꾸는 꿈을 향해, 각자가 믿는 대로 달리는 것. 그러면서 서로의 꿈을 충분히 존중해 주는 것. 그건 참 멋있는 일이다.



[뮤지컬 멤피스]

▷ 개요 : 2002년 미국에서 초연된 뮤지컬로, 우리나라에는 작년인 2023년에 초연이 올라왔다. 실존 인물 DJ 듀이 필립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흑인음악에 심취한 백인 청년이 흑인 구역 클럽에서 펠리샤라는 흑인 여성의 노래에 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 최다 노미네이트되었고, 최종적으로 앙상블상과 작품상(400석 이상)을 수상했다.

▷ 작곡 : 데이비드 브라이언 / 극본 : 조 디페트로 / 연출 : 크리스토퍼 애슐리

▷ 국내 제작사 : 쇼노트 / 국내 연출 : 김태형 / 국내 음악감독 : 양주인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Underground', 'Colored Woman', 'Memphis Lives In Me'

▷ 2023년 초연 캐스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3년 7월 20일~10월 22일)

휴이 역 : 박강현, 고은성, 이창섭

펠리샤 역 : 정선아, 유리아, 손승연

델레이 엳 : 최민철, 심재현

글래디스 역 : 최정원, 류수화

미스터 시몬스 역 : 이종문

바비 역 : 유효진

게이터 역 : 조성린

앙상블 : 오종훈, 최비야, 이종혁, 남궁민희, 정택수, 한준용, 최원섭, 김강진, 김병훈, 서경수, 권오경, 양성령, 손준범, 양병철, 최하은, 김명주, 이준용, 김영은, 최재훈, 박소현, 이승은, 나인석, 김현정



1) 캐스팅 보드 (casting board) : 당일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게시해 둔 것으로, 일반적으로 배우들의 이름, 배역 이름, 사진을 벽에 붙여둔다.

2) 더블 캐스팅 (double casting) : 한 배역에 두 명 이상의 배우가 캐스팅되는 것.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보통 2~3명이 캐스팅되는 편이며, 간혹 4명 이상이 캐스팅되기도 한다. 3명이 캐스팅될 경우 트리플캐스팅, 4명의 경우 쿼드러플캐스팅이라고 쓰기도 한다.

3) 매일 같은 위치에 올라간다고 해서 모두가 앙상블인 것은 아니다. 간혹 작은 조연의 경우 더블 캐스팅 없이 한 명의 배우만이 해당 배역을 맡기도 한다. 그들은 싱글캐스트(single cast), 또는 우리나라에서는 원캐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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