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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29. 2024

뮤지컬이어야 하는 이유

뮤지컬 <영웅>

내가 뮤지컬 <영웅>을 기 전에, 영화 <영웅>이 먼저 개봉해 버렸다. 뮤지컬도 당연히 보러 갈 마음이었지만, 영화화된 버전도 궁금했기에 나는 영화관으로 먼저 향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비장하게 담은 영화는 내 눈물과 콧물을 쏙 빼갔다. 이전부터 좋아했던 뮤지컬의 유명 넘버(*1)들인 ‘누가 죄인인가’와 ‘장부가’를 드디어 눈으로도 만날 수 있었으니 그것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영화관의 음향은 썩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그건 장르의 차이이니 괜찮았다. 전반적으로 영화는 재밌었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훌륭했다.


“이미 영화로 봤는데, 뮤지컬을 또 보러 가?”

“당연하지, 뮤지컬은 다르니까!”

“어떤 게 다른데?”

“음... 하나는 영화고 하나는 뮤지컬이니까...?”


우리는 이미 책으로 읽은 내용을 영화로 다시 보기도 하고, 영화로 이미 알게 된 내용을 책으로 다시 읽기도 한다. 모든 콘텐츠는 줄거리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전혀 다르게 남기도 한다.


그러니 내가 뮤지컬을 봐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뮤지컬이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내가 왜 뮤지컬에 흥미를 느끼는지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초심자였지만, 반드시 뮤지컬을 봐야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쉽지 않은 티켓팅을 해내고, 드디어 뮤지컬 <영웅>을 보러 갔다. 어두워진 공연장, 막이 오르며 무대 위에는 안중근 역 정성화 배우를 중심으로 여러 배우들이 등장했다.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는 '단지동맹'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영화와 동일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보다 더 웅장했다. 그건 현장에서 맞는 배우들의 엄청난 성량과 음압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이 역사적인 사건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처럼 화면을 통해 재가공된 모습이 아닌, 배우들의 그날 그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 관객과 배우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을 더 벅차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는 몇 차례 정제되어 관객에게 닿는다. 배우들은 수차례의 시도를 거쳐 최고의 연기를 끌어내고, 그중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단 한 번의 연기만이 편집을 거쳐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 관객들은 화면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고, 언제 어디서 보든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뮤지컬에서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다. 막이 오르면 관객과 배우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다. 관객들의 눈앞에서는 매일 새로운 '안중근'이 결의를 다지고, 이토를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같은 역할을 여러 배우가 번갈아가면서, 매번 새로운 연기를 펼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모든 연기가 늘 최고는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대사 실수가 나오기도 하고, 배우의 컨디션에 따라 잘못된 음을 낼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장비가 흐트러져 동선이 꼬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날것 그대로의 연기와 노래와 연출이 바로 내가 뮤지컬에 빠지게 된 이유다. 다시없을 명연기든, 약간의 실수든, 그건 오로지 그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만이 누릴 수 있는 거니까.

모든 공연은 어제와 동일할 수가 없다. 매일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만들어지므로, 필연적으로 오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뒤에는 날마다 완벽한 공연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하루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일들을 겪고 올 텐데도, 그들은 무대 위에만 올라가면 안중근이 되고, 설희(*2)가 되고, 이토가 된다. 오케스트라는 실수 없이 박자와 화합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조명도 의상도, 공연과 관련된 모두가 어제와 동일한 순간에 자신의 맡은 역할을 다한다. 매일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자신의 컨디션에서 낼 수 있는 최상의 공연을 만들어낸다.

100% 완벽한 공연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공연은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공연이기에 그 자체로 완벽하다.

뮤지컬은 만들어지자마자 사라지는, 순간의 예술이다. 그 누구도 저장해 둘 수 없는 장면들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해체된다. 날 것 그대로의 아름다운 순간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는 순간들. 완벽하지 않아도 희귀한 그 순간들을, 나는 온마음으로 사랑한다.



[뮤지컬 영웅]

▷ 개요 : 2009년에 초연된 국내 창작 뮤지컬로, 올해 15주년을 맞음과 동시에 10연(*3)을 앞두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다룬 뮤지컬로, 지금까지 정성화, 양준모, 신성록, 민우혁 등 다양한 배우들이 안중근 역을 맡아왔다.

▷ 제작사 : ACOM / 작곡 : 오상준 / 연출 : 윤호진 / 음악감독 : 김문정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누가 죄인인가', '장부가', '그날을 기약하며'

▷ 2024년 공연 주요 캐스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024년 5월 29일~8월 11일)

안중근 역 : 정성화, 양준모, 민우혁

이토 히로부미 역 : 김도형, 서영주, 이정열, 최민철

설희 역 : 유리아, 정재은, 솔지

우덕순 역 : 김진수, 육현욱

조도선 역 : 조휘, 임정모

유동하 역 : 김도현, 신은총

최재형 역 : 장기용, 곽은태

왕웨이 역 : 왕시명, 방보용

링링 역 : 오윤서, 최유정



1) 넘버 (number) : 뮤지컬에 사용되는 노래와 음악. 뮤지컬에 수록된 음악은 곡이나 노래가 아니라 '넘버'라고 부른다.

2) 설희 : 뮤지컬 <영웅>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로, 과거 명성황후를 모셨던 궁녀로 시해 참상을 목격했다 설정이 있다.

3) 10연 : 10번째 공연이라는 뜻. 처음 올리는 공연은 초연, 두 번째는 재연이며, 세 번째부터는 삼연, 사연, 오연 등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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