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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27. 2024

노래가 아니라, 넘버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 공식적으로 공개된 시놉시스 내의 이야기만을 포함하고 있지만, 줄거리를 많이 훑고 있어 보지 않은 분들께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뮤지컬에 삽입된 곡들은 '넘버'라고 불린다. 정확한 어원은 확실치 않으나, 편의성을 위해 장면마다 번호를 매긴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뮤지컬에서는 노래가 줄거리를 이끌어가므로, 멜로디뿐 아니라 가사도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가사들 대부분은 뮤지컬 줄거리 안에서 앞뒤 넘버들과 함께 들어야 보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뮤지컬 삽입곡들은 '넘버'라는 이름으로 그 틀을 항상 유지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넘버가 독립적인 노래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하는 건 아니다. 어떤 뮤지컬에서는 노래가 주인공의 버스킹 장면처럼 하나의 부수적인 요소로 등장할 때도 있고, 아예 뮤지컬 <맘마미아>처럼 유명 가수의 기성곡들을 모아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1)도 있으니까.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에 등장하는 '나비'라는 넘버 역시, 나름 독립적인 넘버로 느껴지는 편이다. 나는 해당 작품을 알기 전에 이 넘버를 먼저 알게 되었는데, 배우 한 명이 부르는 잔잔한 발라드 곡처럼 들렸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무대 위에 단 두 명만이 서는 2인극이다. 주인공 톰이 친한 친구 앨빈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송덕문을 쓰는 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톰은 다소 현실적인 캐릭터로 대도시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앨빈은 그에 비해 감성적인 편인데 고향에 남아 아버지의 서점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둘은 어른이 되면서 서서히 멀어졌다. 톰을 늘 그리워하던 앨빈과 달리, 톰은 어느 순간부터 앨빈을 자신의 과거의 일부 정도로만 여기게 되었다.


'나비'는 둘이 아직은 같은 동네에서 지내던 시절, 톰이 대학 입학 원서에 넣기 위해 처음으로 쓴 동화로, 제출 전 앨빈에게 먼저 들려주는 넘버다. 작고 여린 나비가 생각보다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그려가는 이야기인데, 의도된 바와 같이 가사 자체가 한 편의 동화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때에도, 나는 여전히 듣고 감동받을 수 있었다.


나는 나비야 작고 중요치 않아
세상의 거대함 앞에 난 티끌일 뿐야
팔이 저릴 때 날개를 펴
춤추며 만족해
...

근데 나비는 바다를 꿈꿨죠
흰 파도 위로 날고 싶었죠
하지만 파도 같은 건
너무 위험하기에
바람에게 한번 더 말을 걸었죠
어떻게 그리 빨리 날 수 있죠

바람은 엄청난 얘길 해줬죠
내 몸의 힘은 공기의 흐름일 뿐
그 작은 날개로 시작 돼, 네 날개로
너는 강한 나비야, 나의 힘이야

- '나비' 중



그러나 드디어 뮤지컬을 보러 갔던 날, 나는 비로소 이 넘버 덕분에 왜 뮤지컬은 '노래'가 아니라 '넘버'인 건지를 알게 되었다. 실제 공연에서의 '나비'는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면서 다시 들은, 아니 처음으로 보게 된 '나비'는 아름다운 동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이 되기 직전의 순간, 톰은 고향을 떠나 대학에 가 더 큰 세상을 경험하려 하지만 앨빈은 고향에 남고자 한다. 앨빈은 톰이 떠나는 것을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톰을 억지로 붙잡고 싶지도 않다. 앨빈이 보기에 톰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거였으니까. 그러니 앨빈은 다소 복잡한 마음으로 톰이 쓴 동화를 듣는다.


나는 지금까지 '나비'가 톰이 혼자 부르는 곡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톰 '아주 머나먼 나라에 아름다운 나비가 살았어요'라고 운을 떼며 확신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 머뭇거리는 그 순간 앨빈이 툭, 한 마디를 던진다.


"계속해봐."


앨빈의 대사에 톰은 차근차근 동화를 이어나간다. 톰은 나비도 되었다가, 강물도 되었다가, 바람도 된다. 톰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목소리를 조금씩 바꾸어가며 동화를 구연한다. '나비'의 이야기를 앨빈에게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전달해야 하는 톰의 목소리는 정말 중요했다.


그런데 그런 톰을 뒤에서 계속해서 바라보는 앨빈의 눈빛이 있었다. 이 넘버를 완성하는 건 앨빈의 눈빛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해본다. 복잡한 심경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뒤에서 듣는 앨빈. 톰은 관객을 바라보며 노래하지만, 앨빈은 내내 톰만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 톰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더 이상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지만, 앨빈은 이미 눈빛으로 모든 감정을 다 토해낸다. 그리고는 조용히, 제출하라고 격려해 준다.


이후 앨빈과 톰은 점점 멀어지고, 한참이 흘러 톰은 앨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슬럼프에 빠져 글이 써지지 않던 그는, 어릴 적 약속대로 앨빈을 위한 송덕문을 적으면서 뒤늦게 앨빈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저 어릴 적에 어울리고 다녔던 친구 정도로 여겼던 그는 사실, 톰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억이자 영감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 대부분은, 사실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함께 얽혀있곤 다. 온전히 혼자서 이루어내는 것들은 거의 없다. 우리 각자가 다른 이야기의 일부일 수 있듯, 다른 이들도 우리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톰이 쓴 '나비'도, 사실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바람이 혼자 불고 강물이 혼자 바다로 움직이는 듯해도, 결국 모든 것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시잣되었다고. 나비의 날갯짓에 바람이 세차게 불고, 그 바람이 강물을 바다로 흘려보내, 나비는 다시 그 바람을 타고 파도 위를 날 수 있게 된다. 모든 건 그렇게 서로 얽혀있다.


그저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하나의 넘버 그걸 부르는 배우, 그 배우를 바라보는 배우, 알록달록한 서점으로 꾸며진 무대, 따스한 조명과 잔잔한 연주, 그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질 때 완성되었다.


공연을 보고 난 지금은, '나비'를 음원보다는 영상으로 더 자주 보고 있다. 톰의 표정과 손짓, 그리고 뒤에 앉아 있는 앨빈의 눈빛까지 함께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나비'라는 제목의 동화뿐 아니라, 그걸 쓴 톰과 그걸 최초로 들은 앨빈이 동화 속에 함께 남긴 손자국들이 따스한 조명이 비친 예쁜 무대와 함께 나에게 전달되는 느낌이다.

'노래'가 아닌, '넘버'로.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 개요 : 2006년 캐나다에서 초연되고 2009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010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7번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동화적 분위기가 특징이며, 두 명의 배우만이 연기하는 단막극(*2)이다.

▷ 작·작사 : 브라이언 힐 / 작곡 : 닐 바트람

▷ 국내 제작사 : OD컴퍼니 / 국내 연출 : 신춘수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나비(The Butterfly)', '이게 전부야(This is it)', '눈 속의 천사들(Angels in the snow)'

▷ 2023년 7연 캐스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2023년 11월 30일~2024년 2월 18일)

토마스 위버 : 최재웅, 이창용, 조성윤

앨빈 켈비 : 김종구, 정욱진, 신재범



1) 주크박스 뮤지컬 : 기존에 유행했던 대중음악을 활용해 만든 뮤지컬. 대표적으로 ABBA의 노래들을 활용한 <맘마미아>가 있으며, 국내에도 김광석의 노래들을 엮어 만든 <그날들>과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들을 엮은 <광화문 연가> 등이 있다.

2) 단막극 : 1막만으로 이루어진 작품. 보통 1, 2막으로 나뉘는 작품의 경우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지만, 단막극의 경우 인터미션 없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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