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오픈런'(*1)은 무슨 뜻인가? 대답에 따라 평소 공연을 즐기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구분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오픈런'이라고 하면 인기 있는 매장의 오픈 시간에 맞추어 달려가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 말은 본래 공연 용어에서 왔다. 정해진 폐막일 없이 진행되는 공연을 일컫는 말이다. 즉, 닫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채, 늘 열려있는 채로 쭉 달려가는 공연이다.
우리나라는 사실 오픈런보다는 기간이 정해진 '리미티드런'(*2)방식이 더 흔하다. 각 공연마다 전용 극장을 확보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에서는 한 공연이 몇 년씩 지속되는 오픈런이 흔하지만, 우리나라는 한 해동안 한 극장을 여러 공연이 각기 몇 달씩 나누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도 물론, 오픈런 공연들이 있다. 대학로를 종종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공연 제목들이 꽤나 있을 것이다. 언제 방문해도 곳곳에 걸려있는 제목들인 <빨래>, <김종욱 찾기>, <옥탑방 고양이> (연극)… 모두 각각의 극장을 정해두고 오래오래 공연을 이어가는 작품들이다. 브로드웨이만큼 작품 수가 대단히 많지는 않지만, 대학로가 꾸준히 연극과 뮤지컬의 메카로 인정받는 건 어쩌면 언제 가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오픈런 공연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나도한때 대학로 근처에 살던 때가 있었는데, 정작 그때는 공연의 재미를 알지 못하다 지금에서야 재미를 붙이고 있다. '왜 그때 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달래주는 건 역시 오픈런 공연들이다. 비록 배우를 포함해 달라진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는 공연들이니까.
리미티드런은 대개 2~4개월 정도만 진행되고, 그 기간이 끝나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 불확실함은 리미티드런 공연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반대로 오픈런 공연에는 리미티드런 공연에는 없는 든든함이 있다. 초조하게 공연 기간에 연연할 필요 없이, 언제든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든든함.
<빨래>는 벌써 20년째 진행되고 있는 공연이다. 차수 구분이 되어있어 기본적으로는 개막일과 폐막일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거의 한 달 미만의 재정비 시간만을 두고는 그 즉시 새로운 차수, 새로운 시즌이 바로 시작된다. 일부 배우들이 바뀌거나 새롭게 캐스팅되고 종종 극장을 옮길 때도 있으나, 보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거의 언제든지 가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빨래>는 일상적이고 소탈한 매력을 지녔다. 서울 한 구석에 살고 있는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들이다. 지방에서 온 취업준비생 나영, 몽골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 자신만의 아픔을 간직하고 사는 주인 할매, 맨날 이웃들과 투닥거리면서도 따뜻한 희정 엄마. 이야기 속에는 엄청난 클라이맥스가 있지도 않고, 거대한 반전이 숨어 있지도 않다. 그저 어딘가 누군가 살아갈 일상의 단편을 뚝 끊어 무대 위에 올린 듯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순간이 있을 것이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얼룩 같은 슬픔일랑 빨아서 헹궈버리자 먼지 같은 걱정일랑 털어서 날려버리자
- '내 딸 둘아' 중
빨래는 자주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귀찮고 더럽다고 오래 쌓아두면 쌓아둘수록, 빨래를 해야 하는 사람은 더 힘들어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힘듦도 너무 오래 쌓아두면 그걸 담고 있어야 하는 우리가 너무 힘들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닦아내고 털어내야 한다. 오늘의 아픔은 오늘 빨아서 널고 말려야, 내일의 아픔은 또 내일 빨아서 널고 말릴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매일 극장에는 나영과 솔롱고와 주인 할매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힘든 날에는 다른 누군가가 같이 힘들어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가장 일상적인 내용을, 원한다면 매일같이 가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빨래하듯, 주기적으로 슬픔을 털어놓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다.
인생도 오픈런이니, <빨래>도 오픈런이어야 했다. 인생의 많은 장면들은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가 예고 없이 끝난다. 그렇듯 <빨래>의 이야기 역시 처음과 끝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빨래는 곧 일상의 단편이고, 인생의 단편이다.
오래오래 농익은 <빨래>의 위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으면 한다.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겠지만, <빨래>는 늘 지금처럼 오래도록 대학로 한 자리를 차지한 채 남아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뮤지컬 빨래]
▷ 개요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작품에서 시작되어, 2005년 국립극장에서 정식 초연되었다. 현재 무려 29차 프로덕션이 진행 중이다.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상 및 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작곡상 및 극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제작사 : 명랑씨어터 수박 / 연출, 작·작사 : 추민주 / 작곡 : 민찬홍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서울살이 몇 핸가요?', '참 예뻐요', '내 딸 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