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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Jul 24. 2024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었던 사람들

집으로 가는 길

장마가 예전 같지 않다. 열대지방의 스콜 같아졌달까. 오래 전의 장마는 하루종일, 며칠 연속, 아주 내내 비가 추적이며 내리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않다. 소나기가 쏟아졌다가 그치고, 비가 오지 않는 습한 날씨가 이어지다가 또 한 차례 강한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지는 식이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기후변화인해 날씨는 좀체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최근 내 활동반경에서는 주로 밤에 자는 동안 비가 오고, 낮에는 비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출퇴근길에는 우산을 펼쳐볼 기회조차 잘 없었다. 회사 사무실은 지하철 역과 실내로 이어져있으므로,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의 길에서만 비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우산을 펼칠 일이 없다.


그래서 지난주 언젠가 딱 하루, 우산 없이 출근했다. 가방에 늘 3단 우산 하나 정도는 넣어놓고 다녔는데, 그날은 다른 짐도 많은 날이라 가방이 좀 무거웠다.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하고 가방에서 꺼내두고 나왔다. 딱 그날 하루만.


역시 하루종일 비는 오지 않았고, 퇴근할 무렵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무겁게 안 들고 나오길 잘했다며 안심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그런데 집이 가까워올수록, 몇몇 역에서 비에 젖은 우산을 들고 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엄습하며 날씨를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내든 찰나,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다.


'어떡하지? 비가 갑자기 쏟아져. 데리러 나갈게.'


딱 하루 안 들고 나왔을 뿐인데, 이럴 수가 있나. 집까지는 두 개 역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엄마보다 내가 먼저 역에 도착할 것이었으므로, 내리면 역 출구 안쪽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역 출구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차마 맞고 뛰어갈 용기는 내지 못하고 좁은 출구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삼삼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도 보여서 서로 아는 사이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곳에 모여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종의 동질감이나 연대의식 같은 것이 생긴 듯했다.


나처럼 누군가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단순히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모두들 같은 공간에서 기다림을 함께 했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고, 좁은 출구는 금세 다 찼다.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어느 정도 길은 비켜주어야 했기에, 서로 더 가까이 서 있어야 했다. 늦게 와서 좀 더 바깥쪽에 선 사람들은 튀기는 빗방울을 조금씩 맞을 수밖에 없었고, 안쪽에 선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자리를 조금씩 더 마련해 안쪽으로 끌어당겨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서로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이럴 때 보면 참 쉽게 친절해진다.


잠시 후, 누군가를 데리러 온 남자가 있었다. 입구에 너무 많은 사람이 서 있는 탓에, 그는 데려갈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지 기웃거렸고,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며 '여기 누구 데리러 오셨는데요'라고 너도나도 외쳐주었다. 교복 입은 학생 한 명이 넋 놓고 있다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뛰어나왔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누군가는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인지 전화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혼자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다 지쳤는지 그제야 데리러 와줄 수 있냐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세찬 빗소리 안에 그렇게 드문드문 말소리들이 섞여 들렸다.



조금 지나니, 저 멀리 엄마가 웃으면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고마워, 오늘 진짜 딱 한 번 우산 안 가져온 건데."

"그러게나 말이야, 날씨 진짜 이상하다!"


나는 엄마가 건네주는 우산을 받아서 드디어 집으로 향했다. 엄마를 만난 순간부터 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차츰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동남아의 소나기처럼, 집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뚝 그쳤다.


엄마와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갔을 때, 이런 식으로 비가 쏟아지다 그쳐서 단 한 번도 우산을 펴보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한국의 소나기는 우산을 펼치게 하긴 했지만, 결국 기어코 다시 접게 했다. 우리는 우산을 접으며 웃었다.


아마 모여있던 사람들도 그 순간 흩어졌을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든 비가 그쳤으니, 원래 각자 가려했으로 다시 향했을 것이다. 잠깐의 친분은 그렇게 소나기처럼 금세 사라져 버렸겠지만, 공기 중에 머물러있는 습기처럼, 그렇게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돌아갈 집도 있고, 데리러 와줄 사람도 있다는 것이 새삼 기뻤던 그 순간의 내 마음이, 지금까지도 아늑하게 내 안에 남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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