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에서 출발한 비행기 안
지난해 연말, 엄마와 함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다녀왔다. 안 가본 나라에 간다는 설렘을 느끼는 것도 잠시, 비행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평소 말레이시아 옆 싱가포르로 출장 갈 일이 종종 있는데, 늘 터뷸런스 때문에 괴롭기 때문이다.
나의 주관적인 경험뿐일 수도 있지만, 미주나 유럽으로 장시간 비행을 할 때보다 유독 싱가포르나 동남아 국가에 다녀올 때의 흔들림이 더 심하게 느껴진다. 한 번은 이륙 후 3시간 동안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지를 않아, 이후 드디어 꺼졌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미 화장실 앞에 6명이 서 있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여행하려면 감수해야 하는 일. 예상되는 터뷸런스의 괴로움에는 '흐린 눈'을 하고, 말레이시아 방문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인천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가던 날은 걱정했던 것보다 터뷸런스가 심하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날 타게 된 밤비행기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마어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눈앞에 있는 모니터에는 일부러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두었지만, 화사한 화면 안에서 유쾌한 농담이 흘러나와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팔걸이를 쥔 손이 달달 떨릴 정도였으니, 잠에 들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깜빡이는 안전벨트 표시등은 더욱 공포감을 조성했다. 이 괴로운 시간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잠시 난기류가 멈춘 듯했다가도, 숨을 돌리려 하면 또다시 되풀이되었다. 남은 5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걱정하며 심호흡을 해보고 있는데, 기장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제가 오늘 기상상황을 보니 앞으로 5분 후부터 약 10분간 난기류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안전벨트 잘 착용해 주세요.
그동안 그렇게나 많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이런 방송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비행기가 흔들리고 있으니 자리에 착석해 달라'는 정도의 결과론적 멘트만을 해주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형태의 방송이라니. 이 짧은 문장 안에는 터뷸런스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며 우리 비행기가 기장이 예측한 대로 잘 가고 있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비행기는 점점 더 심하게 흔들렸고, 기장이 말한 10분이 지나서도 계속 흔들렸지만, 나는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구간 도로를 달리는 것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전 수십 번의 비행에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분함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아무리 많이 타도 늘 승객일 뿐, 비행기가 뜨는 원리나 난기류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식이 없다. 난기류가 예측 가능한 기상상황이고 항공기 승무원들은 미리 이 사실을 확인하고 비행을 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당연한 사실인데도,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패닉에 빠질 때는 떠올리기 쉽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 기장의 차분한 목소리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긴장이 조금 놓이는 경험을 했다.
파일럿은 비행기에만 있지 않다.
'지금은 죽을 것 같아도,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질 거야.'
'나도 비슷한 일 겪어봤는데,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일 아니야. 지나고 보면 웃게 될 거야.'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라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낯선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따스한 말 한마디와 다정한 손짓을 필요로 한다. 친절이란, 건네는 사람에게는 별거 아니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전부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언젠가 나보다 몇 걸음 앞서가던 누군가가 나를 안심시켜 주었던 것처럼, 나도 언제나 뒤를 돌아보며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