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캬비크 시내 곳곳
드디어 머리가 개운했다. 며칠 내내 차를 너무 오래 탔던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띵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말끔했다.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호텔에서 마지막 조식을 든든히 먹고, 레이캬비크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예보상으로는 때때로 비가 올 거라고 했는데, 호텔 문을 열고 나와보니 다행히 조금 흐리기만 할 뿐 빗방울은 보이지 않았다. 늦잠을 자도 되는 날이었지만 레이캬비크에서의 날도 기대가 되었는지 일찍 눈이 떠져, 결국 다른 날들과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다.
덕분에 거리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노란색과 오렌지색으로 물든 늦가을 분위기를 한껏 즐기며, 가장 먼저 트요르닌(Tjörnin) 호수로 향했다.
트요르닌 호수는 걷기 좋은 호수로, 호숫가에는 집들과 레이캬비크 시청이 위치해 있다. 평일 오전 9시에 산책 나온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었다. 오리와 백조 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사람들이 자꾸만 먹이를 던져주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큰 빵수프'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귀여우면서도 왠지 더럽게(?) 느껴지지만, 호수 자체는 맑아 보였다.
10년 전 저녁 무렵에 방문했을 때는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점차 맑아졌다. 하늘에 구름이 조금 끼어있었을 때도 예뻤지만, 구름 틈 사이로 햇빛이 점점 진하게 뚫고 나오자 호수가 더 예쁘게 빛났다. 사람은 여전히 별로 없었지만, 따뜻해질수록 오리와 백조 들은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호숫가에서 서성이다, 문득 바로 옆 시청이 궁금해졌다. 시청 건물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혹시 안 되는 거면 제지하겠지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안에는 견학 온 걸로 보이는 학생들 무리가 있었다. 복도에 서서 학생들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를 기다린 뒤, 그들이 서 있던 곳으로 내려갔다. 입체적인 아이슬란드 지도가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구경한 곳들, 그리고 앞으로 갈 곳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곳에서 창밖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들어가 보아야만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다시 나와서 거리를 걷다 보니 레이캬비크, 아니 아이슬란드 유일의 성당이 보였다. 아이슬란드는 기독교, 특히 루터교가 많아서 교회 시설이 많은데, 중심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천주교 성당 한 곳(Cathedral of Christ the King)이 외롭게 서 있다.
아주 화려하진 않아도 적당히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예뻤다. 온 김에 안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문이 안 열렸다.
문은 누가 봐도 밀어야 할 것처럼 생겼는데, 아무리 해도 안 밀렸다. 평일 오전이라 아직 안 열었나 보다 아쉬워하다, 아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겨보았는데...
열렸다! 내부는 특별히 화려하진 않지만, 딱 레이캬비크 같았다. 그 자리에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잔잔한 아름다움.
못 들어가나 싶었는데, 이 문이 당겨지는 문이었다니.
문고리를 잡고 오른쪽 방향으로 내리면, 뒤로 문이 활짝 열릴 줄 알았는데, 가운데 튀어나온 흰색 기둥 같은 것이 오른쪽 문의 일부였다. 착시효과에 넘어가 계속 밀기만 했는데 당겨야 비로소 열렸다. 역시 일단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흐렸던 날씨는 점점 밝아져, 시내에 빛이 넓게 들었다. 레이캬비크는 높은 건물은 거의 없지만, 높이와 상관없이 색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의 모습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집주인이 취향껏 정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그 채도와 색감이 다양하게 칠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주변 집들과 잘 어우러졌다.
이곳의 풍경은 시내 명소인 할그림스키르캬 교회에 올라가면 더 잘 내려다보인다. 구름이 조금 걷혔으니, 전망대에 올라가 보아도 괜찮을 시간이 된 듯했다. 가는 길에는 일부러 트요르닌 호수를 다시 살짝 들러, 낮 햇살을 맞아 더 활기 있어진 풍경을 한 번 더 구경했다.
할그림스키르캬는 레이캬비크의 대표적인 명물로 꼽힌다. 오르간 파이프에서 영감을 받은 모양이 매우 인상적인 건물이다. 유방암 예방 캠페인의 일환으로 우리가 머문 동안은 밤마다 핑크색으로 빛났는데, 낮에는 여전히 회색흙빛으로 서 있었다.
역시나 내부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전망대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입장권을 사는 것도 줄을 서야 했고 탈 때도 또 줄을 서야 했는데, 날이 너무 맑고 좋아서, 전망이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알록달록 레이캬비크 풍경이 너무나 예뻤다. 사면의 모든 창밖으로 고개를 내놓고 구경했다. 정시에는 종이 치는 것도 봤는데, 천장에 달린 종을 기계식으로 치는 거였다. 기계식 종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신기하게 올려다보았다.
결혼식을 진행한다고 해, 서둘러 교회에서 나와 시내를 좀 더 걸었다. 길가에서 기이한 풍경을 발견했는데, 한 학교 건물로 보이는 곳의 주차장이었다.
저마다 제각각의 방향으로 세워진 차량 무리를 보니, 애초에 어떻게 주차를 했는지도 궁금했는데, 어떻게 빠져나갈지는 더더욱 의문이었다.
우리는 입구가 사라진 꽉 찬 주차장에서 누가 가장 먼저 나가야 순서대로 원활히 빠져나갈 수 있나를 짐작해 보다가 포기했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대체 어떻게 빠져나왔을지,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주차해 와서 아무 문제가 아닌 건지, 궁금증을 가득 안고 왔다.
또 걷다 보니 예능프로그램 '서진이네'를 찍었던 집도 발견했다. 아쉽게도 공사 중이어서 외관 말고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공사 현장답게 주위에 펜스가 쳐져 있었다. 그래도 초록색 지붕은 이곳만의 매력으로 빛났다. 아쉬운 대로 근처의 공원을 걸으며 꽃들을 눈에 담았다.
이날 옮길 숙소는 원래 2-3시 이후에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시내를 누비는 사이 갑자기 연락이 왔다. 숙소 문이 벌써 우리에게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점심 식사 전에 후다닥 숙소를 옮기는 게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우리가 받은 비밀번호가 작동되는지 확인해 본 뒤, 곧장 호텔로 가서 맡겨둔 짐을 찾아왔다. 기존 호텔과 새로운 숙소는 불과 200m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비 온다더니, 맑기만 하네?"
이왕이면 비가 오지 않는 게 좋으니 다행이었다. 맑은 하늘에, 산뜻한 기분으로 짐을 풀어놓았다. 취사가 가능한 주방이 있는 아파트형 숙소였다. 여행 계획 당시 굉장히 오래 고민하고 비교하다 고른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넓고 깨끗해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대강 정리를 하고 나니 12시 45분. 1시에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하면 딱이었다.
"이게 뭐야?"
숙소 밖으로 나선 지 30초, 갑자기 머리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비가 오는 건가 했는데 그러기엔 콕콕 박히는 느낌이 선명했다.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니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다니는 하루일 줄 알았더니, 하늘 문까지 열릴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