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캬비크 걷고 맛보고 듣기
아니 저 앞에 푸른 하늘이 보이는데, 우박이라니! 이렇게 어둡지 않은 날에도 이렇게 단단한 우박이 내릴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역시 아이슬란드 날씨다."
"이것도 5분 뒤면 그치겠지? 하필..."
우박을 피해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환하게 갠 하늘이 우리를 놀리는 듯했다. 역시 아이슬란드답다.
그래도 모처럼, 아니 아이슬란드에 머무는 동안 유일하게, 좋은 식당에 와 있었으니 금방 마음이 풀렸다. 물가가 비싸서 외식보다는 싸 온 음식들을 먹는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해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이날이었다.
몇 안 되는 외식이라면 꼭 이곳에 오고 싶었다. 애피타이저 랍스터타코 때문이었다. 이게 그렇게나 맛있다고 극찬하는 후기가 얼마나 많던지. 한 접시에 4개가 나온다기에, 두 접시를 주문했다. 이왕 먹는 거 넉넉히 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날 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처음에 한 접시만 주문했더라도 분명 한 접시 더 추가했을 것이다. 랍스터가 입에서 녹았다. 튀긴 살이 어떻게 입에서 녹아내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당히 얇고 적당히 쫄깃한 또띠아 위에는 살살 녹는 랍스터튀김, 치즈, 그리고 고수 등이 어우러졌는데, 조합이 환상적이었다.
그 외 우리 취향껏 주문한 메인 메뉴들도 성공적이었다. '오늘의 생선' 요리는 볼락(ocean perch)과 대구였는데, 부드러운 생선도 함께 나온 매쉬드 포테이토도 맛있었다. 쉘피시 파스타는 로제소스에 새우, 랑구스틴, 관자 등이 들어가 푸짐했고, 해산물 식당답지 않게 '오늘의 요리'였던 치킨 프라이는 의외로 독특하고 맛있었다. 함께 나온 순무 튀김도 인상적이었다.
만족스럽게 먹은 식사를 소화도 시킬 겸, 말끔하게 갠 날씨를 즐기며 바닷가로 향했다. 사실 이날 나는 투파(Þúfa)에 가보고 싶었다. 지난해 친구와 갔던 한 사진전에서 묘한 초록 언덕 사진을 보았고, 그걸 찾아보니 레이캬비크에 있는 투파라고 했다. 잔디가 자라는 인공 언덕으로, 위의 헛간에서는 생선을 말린다고 한다. 싱그러운 초록의 언덕에서 생선을 말린다니 독특한 조합에 궁금해졌다.
다만 위치가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항구를 지나 꽤 걸어 올라가야 했다. 전날 랍스터 수프를 먹은 식당 근처만 적당히 지나면 되겠지 싶었는데, 아무리 걸어도 언덕은 가까워지지 않았고 빙글빙글 도는 길은 돌아도 너무 돌아가고 있었다.
"근데, 저기 가면 뭐가 있는 거야?"
"음... 언덕과 말린 생선?"
그냥 멀리서만 보기로 했다. 그래, 언제 또 날씨가 변덕을 부릴지도 모르는데, 우리라도 여유를 찾아야지. 날씨처럼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지 말자. 홍길동이 아니니까.
먼발치에서 본 것만으로 만족하고, 다시 밑으로 걸어 내려왔다.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나던 항구 쪽을 떠나오니 레이캬비크의 옛 풍경들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비교해 둔 공간이 있었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여유를 되찾으니 눈에 들어온 행운이었다. 지금 우리가 걸으며 보고 있는 건물들이 대부분 130년 전에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재밌었다.
그 뒤에는 바로 콘서트홀인 하르파가 보였다. 하르파 뒤편에는 요트들이 가득 정박되어 있었고 작은 등대도 있었는데...
건너편에 투파도 보였다. 먼발치에서 보면 되지 뭐! 이렇게 보니 얼마나 먼지 새삼 다시 실감 났다. 저길 걸어가려 했었다니. 진작 포기해서 다행이었다.
여유롭게 등대를 구경하고, 하르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공연장이자 회의장으로 쓰이는 건물인데, 저마다 다른 색으로 칠해진 유리창들로 이루어져 있다. 햇빛이 들 때 밖에서 보는 모습도 굉장히 예쁘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아도 번쩍이는 천장과 벽면이 인상적이다. 예전에도 여기서 공연을 보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아쉽게도 생각만 했다. 대신 우리는 저녁에 다른 공연을 볼 계획이었으니 이번엔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르파에서 다시 나와 바닷가를 쭉 걷다 보니 선보야저도 보였다. 바이킹 배를 형상화한 듯한 조형물인데, 태양과 희망, 자유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처음 봤을 때는 마냥 멋졌는데, 이날 다시 보니 선보야저뿐 아니라 해안가에 쭉 늘어선 소소한 노란 등대들도 함께 눈에 띄었다. 날이 좋아서 산책하기 좋아, 우리는 목적지 없이 계속 걸었다.
"오 쌍무지개다!"
"근데... 비가 또 오는데?"
예쁜 무지개를 발견하기 무섭게 또다시 빗발이 쳤다. 하지만 우린, 이미 방수되는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으니 모자만 쓰면 그만이었다. 아이슬란드 날씨의 장점이자 단점이, 5분에 한 번씩 날씨가 바뀌는 것이니까. 이번에도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그치고 다시 해가 났다.
갠 날씨 속에서 노란 회프디 등대를 한적하게 즐기고(중간에 또 한 번 빗방울이 내렸지만), 다시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박물관이라든가 더 구경하려면 더 구경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여유를 즐기는 게 좋았다.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미리 찾아둔 곳들 중 디저트가 맛있어 보이는 베이커리 카페를 한 곳 골랐다. 아이슬란드식 디저트와 커피와 차를 주문했다. 커피는 생각보다 좀 쓰고 세서 입맛에 잘 맞진 않았지만, 호기심에 주문한 모스차 (Icelandic moss black tea)는 매력적이었다. 이름과 달리 홍차보다는 녹차에 가깝게 느껴졌는데, 그 향이 은은했다. 우유도 함께 제공해 줬는데 밀크티로 마시는 것도 좋았다.
함께 주문한 빵들도 다 맛있었다. 아이슬란드식 디저트들로 고심해서 주문한 메뉴들이었다. 짧고 통통한 꽈배기 같은 클레이자(Kleina) 도넛은 레몬 들어간 느낌이라 상쾌한 느낌이 났고, 스누두르(Snúður)은 우리 가족이 모두 평소에도 좋아하는 시나몬롤이나 다름없어서 기대가 컸는데 은은하고 많이 달지 않아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행복한 결혼 케익'이라는 별명이 있는 루바브 케익(Hjónabandssaela)도 맛있었다. 루바브 케익은 10년 전 아이슬란드에서 처음 먹어보고 좋아하기 시작했던 메뉴라, 아이슬란드에 다시 오면 꼭 먹고 싶은 메뉴였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낸 뒤, 숙소 근처 마트에 들렀다. 식사는 대부분 한국에서 사 온 식품들로 해결할 것이었지만, 그래도 과일과 요거트, 과자, 투어 때 먹을 간식 등을 사러 한 번씩 들를 때마다 재밌었다. 그릭요거트처럼 꾸덕한 아이슬란드식 요거트 스키르도 다양한 맛으로 돌아가며 사보고. (전날의 가이드가 추천해 준 크렘브륄레 맛이 최고였다)
씻고 좀 쉬다가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카페에서 이미 배가 다 찼는지, 한국에서 사 온 누룽지나 조금 뜯어먹었다. 이 정도면 밤에 잠들기 전까지 배고프진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소소한 마지막 일정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바로 뮤직바! 이곳은 서점으로도 운영되지만, 매일 저녁 8시면 라이브 바로 변신하는 곳이다. 한국에서부터 가보고 싶다고 적어놓고 갔는데, 이전에 묵은 호텔 방에서 바로 내다 보여서 신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레이캬비크 시내는 크지 않다) 그 호텔에 묵을 때 밤마다 음악소리가 들렸는데 그래도 10시 넘으면 조용해지곤 했었다.
7시 반쯤 갔더니 이미 좋은 자리는 다 차고 없었다. 그래도 근처 테이블에 앉아서 난간 사이사이로 구경할 정도의 자리는 잡을 수 있었다. 8시 부근에 도착한 사람들은 서 있어야 했으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아빠와 나는 맥주를 주문하고, 엄마는 페퍼민트티를 주문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음악은 대부분 올드팝 위주였다. 며칠 전 호텔에서 귀동냥(?)으로 들었을 때는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이나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 등 아는 노래가 좀 더 많았는데 이날은 그 정도는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어디선가 들어본 노래들이 많아서 분위기에는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엘튼 존의 Tiny Dancer, 프린스의 Purple Rain, 실제로 아프리카 여행 당시 많이 들어서 여행 느낌 물씬 나는 토토의 Africa 등이 생각난다.
I only want to see you laughing
In the purple rain
- Prince, Purple Rain
Purple Rain의 가사는 단순하지만, 푸른 하늘 (혹은 우울함을 뜻하는 blue)에 빨간 피, 둘이 섞여서 보랏빛 비가 내리는 순간을 표현한 거라고 한다. 세상이 끝날 수도 있는 그 순간에 결국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를 택해야 한다는 내용.
당시의 우리는 세상의 멸망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리고 하늘에서는 투명한 빗방울과 우박만이 내렸을 뿐이지만, 어떤 날씨든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그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비바람 맞고 거친 날씨 속을 뚫고 그런 상황들 속에서도, 심지어 평화로울 줄 알았던 하루에도 우박이 쏟아질지라도, 즐거웠다고 기뻤다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날들.
실내에서 많이 머물렀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은 다시 밖으로 나간다.
그 시간들도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