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 페루 쿠스코(Cusco)
나는 무언가를 빨리 좋아하고 금방 빠져드는 편이다. 흔히 나 같은 사람을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라고 부르며 쉽게 좋아하고 쉽게 질려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며, 편견이다. 한번 듣고 푹 빠진 노래는 지금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한번 보고 좋아하게 된 영화는 지금도 대사를 줄줄 읊을 만큼 사랑한다. 첫눈에 반해 사랑했던 사람은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먹먹해진다. 단지 좋아하고 빠져드는 시간이 짧아 남들보다 좋아하는 대상이 많을 뿐인 것은 아닐까. 많은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많은 것을 좋아하게 되고, 그렇게 좋아하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내 세상은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언제나 적극적으로 첫눈에 반할 자세를 하고 있었다.
페루에서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했다. 쿠스코에서 착륙하며 바라본 창밖이 너무나 예뻐서 한없이 바라보느라 사진조차 찍지 못했다. 리마 근교와 나스카까지는 거의 사막 지대였는데, 오랜만에 초록색이 가득한 풍경이 보였다. 그 위에 붉은색 지붕의 집들이 붙어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내내 창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밝은 건물들이 많았던 리마와는 달리, 쿠스코는 옛 수도임을 증명하듯 어두운 붉은빛으로 무게를 잡고 있었다. 건물들을 보면 볼수록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었고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엄마에게 외쳤다. "엄마, 나 여기서 며칠 더 있고 싶어." 제대로 구경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이곳을 떠나는 시간을 걱정하고 있었다.
쿠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볼리비아 대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하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까지만 해도 날이 맑았는데, 시내 구경을 시작하려고 하니 갑자기 흐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붉은색의 분위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밝은 빛깔이 가득했던 리마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쿠스코 자체가 어두웠던 것은 아니다. 날씨가 쿠스코의 밝은 면을 잠시 가렸을 뿐, 오래된 건물들의 어두운 색감이 적당히 무게를 잡아주는 반면, 광장의 풀밭은 화창함을 지니고 있었다. 리마의 아르마스 광장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훨씬 웅장한 느낌이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잉카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건물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주변 집들과 비슷하게 생겨서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박물관 내에는 무늬가 예쁜 오래된 토기들 등 다양한 잉카 유물들이 전시되어있었지만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찾기가 어려워 그냥 쭉 훑어보고 나왔다. 앞으로 볼 잉카 유적지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얻고 싶었으나 유물들을 구경하는 것에 그쳤다.
박물관 건물은 스페인에서 많이 보던 건물들과 비슷하게, 아치형 회랑이 있었다. 1층 뜰에는 이렇게 베틀로 옷감을 짜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짜고 있는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연습해온 것일까.
쿠스코의 건물들을 보면, 벽의 아랫부분은 돌로 이루어져 있고 윗부분은 시멘트인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리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나무 발코니도 많이 보인다. 아랫부분은 잉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윗부분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반드시 모든 건물들이 그렇게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오래된 건물들이 꽤 있다고 한다.
이 수많은 돌들 중에도 스타는 있다. 제각각 다른 모양의 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각을 자랑하고 있는 12각돌. 아무런 표시가 없어서 이 벽에 있는 것을 몰랐다면 찾지도 못했을 것 같다. 게다가 아래쪽에 위치해서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몇 개의 큰 돌들의 각을 일일이 세어본 뒤에야 발견했다. 어쩜 이렇게 돌을 딱 맞게 제작했는지, 정말 놀라웠다. 다음날 쿠스코 근교 유적지 투어 때 들은 거지만 처음에는 작은 돌들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벽을 만들었고 중반에는 돌들 사이에 시멘트 같은 것을 발라 올리는 식이 되었고, 나중에는 이런 식으로 돌을 깎아 딱 맞게 만들어서 끼워 맞추었다고 한다.
코리칸차, 혹은 꼬리깐차라고 불리는 곳은 태양의 신전인데, 코리칸차란 케추아 말(잉카 시대)로 '황금사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황금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스페인이 침략한 이후 황금을 전부 약탈해갔기 때문이다. 그저 스페인인들이 '황금빛으로 빛났다'라고 남긴 기록을 보고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황금을 약탈하고 이곳을 산토도밍고 성당으로 바꾸어놓았다. 그 이후 쿠스코에는 큰 지진이 두 번 정도 났었는데, 스페인인들이 지은 건물들은 다 무너졌지만 코리칸차 하단부 석벽(사진 속 거무스름한 부분)은 굳건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잉카 시대 석조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스페인식 건물들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나라 역시 식민지 시대를 겪었고 많은 문화유산들을 약탈당하고 파괴당했다. 그래도 우리는 36년 만에 독립하였다. 여전히 많은 숙제가 남아있고 풀리지 않은 서러움과 분노가 있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포함해 많은 것들을 지켜내기도 했다. 그에 반해 남미의 나라들은 10배인 300년 동안 식민통치를 받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나라를 점령당했던 그들은 이제 침략자들의 언어를 쓰고, 침략자들의 종교를 믿는다. 남미 여행 내내 이 부분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밤에는 야경 시티투어를 하기로 했다. 볼리비아 비자 발급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점심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후 내내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팠다. 저녁 식사는 투어 후에 하기로 하고, 광장 근처에서 엠빠나다(empanada, 소고기나 닭고기 등을 빵 반죽에 넣은 스페인/중남미식 만두)를 사 먹었다. 짭조름한 작은 만두를 허기를 채우는 데에 충분하지 않았지만 잠시의 배고픔은 잊게 해주었다.
투어 버스는 아르마스 광장에서 출발해 낮에 보았던 코리칸차까지 쿠스코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쿠스코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다음날 갈 삭사이와망(Sacsayhuaman) 근처의 예수상(Cristo blanco)이었다. 바람을 온전히 맞는 2층 버스에 앉아 있으려니 꽤 추웠다.
끝까지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쿠스코의 야경은 정말 예뻤다.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꽤 넓게 불빛들이 퍼져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가장 환하고 짙게 빛이 나는 부분은 쿠스코의 중심, 아르마스 광장이다. 노란 불빛들을 보니 리마에 처음 내렸을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곳의 예수상 위에는 달이 함께 떠 있었다. 예수상의 크기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보다 훨씬 작지만(약 8m 높이) 그 모습은 비슷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쿠스코의 야경도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골목골목 가까이에서 보는 쿠스코의 야경도 멋졌다. 불빛들이 내는 열 때문인지, 아니면 노란색이 주는 포근함 때문인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쿠스코와 사랑에 빠졌나 보다.
시티 투어 후,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근처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마늘 수프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마늘 수프를 주문한 것은 순전히 네팔의 기억 때문이었다. 약 2년 전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할 때, 고산병 예방을 위해 마늘 수프와 레몬 생강차를 자주 먹고 마셨다. 쿠스코는 해발 3,400m에 위치해 있다. 2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네팔의 효과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번에는 산행을 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다행히 숨만 조금 가쁠 뿐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산지대에 있으려니 마늘 수프가 생각나서 주문했다. 그때 먹었던 수프와는 많이 다르지만, 마늘 향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네팔과 쿠스코는 모두 내가 사랑하게 된 나라이며 도시이다. 나는 여전히 어디서든 레몬 생강차의 향기만 맡아도 그곳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쿠스코는 어떤 것으로 기억될지 궁금하다.
# 사소한 메모 #
*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법: 풍경을 담은 사진, 기분을 기록한 글, 그리고 마음을 깨우는 냄새, 맛, 소리.
*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꽉 막힌 것은 아니다. 오래 산 만큼 꿈도 많은 사람들도 많다.
* ♬ Bruno Mars - Count on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