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고

Day 9 - 페루 쿠스코(Cusco), 볼리비아 라파스(La Paz)

by 바다의별

제목은 볼리비아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남미 전체가 그렇다. 뭐 하나 분명한 일처리도 없고, 느리기는 또 어찌나 느린지. 점차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기는 했지만, 이날은 여행 초반이었기에 정신적으로 무장이 덜 된 상태였다.

이날 오후, 남미 여행 중에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겠다고 여실히 느꼈고, 이틀 뒤 우유니에서는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전날 밤을 쿠스코의 병원에서 보낸 뒤, 엄마는 한결 좋아지셨다. 원래 일정대로였다면 쿠스코에서 장시간 버스를 타고 푸노로 가서 푸노에서 또 다음날 장시간 버스를 타고 라파스로 이동을 할 것이었는데, 우리는 쿠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곧장 라파스로 이동했다. 그래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침에 병원 1층에 위치한 약국에서 약을 받으려는데, 약사가 약을 찾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한참을 찾더니 처방전에 적힌 6개의 약 중 3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왜 자기 병원 약국에 없는 약을 처방해준 것인지, 약사는 왜 약을 찾는 데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 비행시간은 다가오는데 황당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약국에 있는 약만 사기로 하고 신용카드를 내밀었더니 카드 계산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날 밤 병원비도 이미 카드로 결제했고, 약 역시 같은 데스크에서 결제하는 것이라 카드 결제가 가능한 것을 확인받은 후였는데, 지금은 안 된다고 했다. 페루 현금은 다 써서 없는데 달러로도 받느냐니까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냥 처방전을 들고 그냥 다른 약국에 찾아가겠다 하니 그것도 안 된다고 막아섰다. 당장 공항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소리치니 그제야 카드를 달라고 하더니 결제해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일어나 처방전을 들고 그냥 바로 라파스로 가는 거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쿠스코 공항에 도착했다. 이륙하기 1시간 15분 전이었다. 부랴부랴 체크인을 했는데, 게이트는 30분 후에 열린다고 하여 그냥 앉아서 기다렸다. 허탈했다. 이럴 거였으면 병원에서 그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엄마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라파스 공항에 내리니 고지대라 약간 어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출구 앞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공항 택시를 타야 한다고 들었기에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다. 공항 택시에 대해 물어보려는데 국제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인데도 직원이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수많은 남미의 공항들을 겪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국제공항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중남미 국가들과 연결되는 항공편들이니 영어가 필수는 아니겠다 싶다. 하지만 그때는 참으로 황당했다. 다행히 나는 말을 잘 하지는 못해도 대충 눈치껏 알아듣기는 하기 때문에 직원이 일러준 대로 가서 공항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공항 택시 기사들은 모두 보라색 니트를 유니폼처럼 입고 목에는 신분증 같은 것을 걸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에콰도르 키토 공항에서는 조금 더 시스템화 된 공항 택시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라파스든 키토든 공항 택시 시스템은 우리나라에 도입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토의 경우 공항에 택시 센터가 따로 있어서 주소에 따라 거기서 적어주는 공식 가격을 받아 택시 기사에게 준 뒤, 내릴 때 그 금액을 내면 되는 시스템이다. 요즘 우리나라에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택시비를 터무니없이 많이 받는 사기꾼 기사들이 많은데, 우리도 이런 건 배워왔으면 좋겠다.


어쨌든, 아침부터 진을 뺐더니 피곤해져서 얼른 숙소에 가고 싶었다. 짐을 풀고 또 한 번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중간에 차가 멈추더니 다시 출발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신호 대기를 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앞을 내다보니 시내로 이어지는 도로가 쭉 보였고, 길이 완벽하게 꽉 막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이래서 라파스 교통이 최악이라는 거구나.

라파스에는 독특한 대중교통 수단이 있다. 바로 케이블카다. 케이블카가 관광객용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교통수단이다. 누구나 라파스에 도착해 한두 시간만 있어보면 왜 그런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집들이 빼곡하게 산비탈에 지어져 있으니, 지하철을 만든다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지하철을 만들겠다고 착공하는 순간 이 도시는 지금보다 더한 카오스가 될 것이다.) 나중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며 내려다보니, 빼곡한 집들 사이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계단들이 이어져있었다. 케이블카조차 가까이 안 지나는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다니는 걸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로부터 추천받은 병원에 가보았다. 피부과 전문 병원들은 모두 대기시간이 너무 길거나 예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어서 그냥 일반 종합병원에 갔다. 국가의 생활수준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페루보다 볼리비아의 의료시설이 좋은 것은 아닐 테지만, 잠시 본 바로는 페루의 작은 도시인 쿠스코보다는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스의 시설이 더 좋아 보였다. 의사들도 가운을 입고 다녀서 의사 같았고 열을 재는 것도 도구를 사용하고, 훨씬 더 체계적이었다. 의료진이 영어를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나의 초급 스페인어와 눈치는 언제든 유용했다. 일단 처방받은 6개의 약을 보더니 지나치게 많다고, 그리고 지금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말해줘서 더 믿음도 가고 안심도 되었다. 쿠스코의 병원들은 모두 하릇밤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주사만 맞으면 된다고 했다. 드디어 마음이 편해진 순간이었다.

라파스 피자집 '모짜렐라(Mozzarella)'

마음이 편해지니 배가 고파져서 익숙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라파스에서 가장 맛있다는 피자집에서 식사를 했다. 토핑이 굉장했다. 우리의 다른 일행들은 아직 푸노에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엄마와 나는 식후에 둘이서 근처 시내를 둘러보았다.

식당 근처에는 마녀 시장이 있었다. 마녀 시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각종 주술 등을 위한 용품을 팔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은 처음 봐서 독특하기도 했지만 몇몇 용품들은 보고 있으면 다소 불쾌해지기도 했다. 가끔 중간중간 포프리나 일상적인 물건들을 팔고 있기도 해서 그런 걸 주로 보면서 길을 걸어내려갔다. 매년 봄마다 항상 한 두 다발씩 사다 두는 프리지어를 올해는 살 수 없으니 말린 포프리를 보며 대리 만족했다.

마녀 시장에서 걸어 내려오니 산 프란시스코 성당과 광장이 나왔다. 성당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라파스 역시 페루에서처럼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럽식 건물, 특히 발코니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위로 갈수록 리마 근교에서 보던 철근도 안 자른 그런 집들이 많았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낮은 지대에서 살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산비탈에 겨우겨우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무리요 광장 (Plaza Murillo)

걷고 걸어 무리요 광장(Plaza Murillo)까지 왔다. 라파스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광장이다. 광장 옆에는 대통령궁도 있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여느 남미의 대도시들에서처럼 아르마스 광장이었는데,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Pedro Domingo Murillo)라는 독립운동가가 교수형을 당한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무리요 광장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시계다. 잘 보이지는 않는데, 자세히 보면 시계가 거꾸로 되어있다. 숫자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적혀 있어 3시 5분인데 9시 5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는 다음날로 이어가겠다.

저녁이 되자 일행들이 도착을 했고, 식사 후 야경을 보러 다 같이 킬리 킬리 전망대(Mirador Killi Killi)로 향했다. 식사하러 갈 때에도 라파스의 교통지옥을 또 한 번 맛볼 수 있었다. 1km 떨어진 식당까지 택시를 탄 것이 잘못이었다. 20분 넘게 500m도 못 가 결국 중간에 내려 걸어갔다.

노란 불빛만 가득했던 쿠스코의 야경과는 조금 다르게 이곳은 불빛 색들이 조금 다양했다. 어쩌면 쿠스코에서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불빛들이 구분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은은하게 보름달까지 떠서 더 예뻤다. 우유니에서 이 보름달을 원망하게 될 줄도 모르고.



드디어 정신적, 물리적으로 피곤한 하루가 다 지났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성격이 원체 급한 나는 정말이지 속 터지는 하루였다. 남미 여행을 마친 지금, 사람들이 남미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이 대화로 대답을 대신한다. 참고로 배낭 패키지의 인솔자는 팀장으로 칭했고,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팀원이었다. 우유니로 향하는 밤 버스를 탑승한 직후의 대화다.


- 팀원: 팀장님, 이 버스에는 안전벨트가 없나요?

- 팀장: 없으면 없는 거예요.


# 사소한 메모 #

* '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 내가 여행할 때 가장 들기 좋아하는 가방이 낡아서 끈이 자꾸 떨어진다. 여행 중반 즈음에서는 가방을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어도 기억이 동일할 수는 없다. 당신은 내가 주인공인 배경을 보고, 나는 당신이 주인공인 배경을 보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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