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0 - 볼리비아 라파스(La Paz)
라파스 둘째 날이 되었다. 엄마가 조금 괜찮아지시니 이번에는 내가 안 좋아졌다. 아침부터 약간의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조금 쉬기로 했고, 엄마는 우유니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진료받고 약을 받기 위해 피부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 한번 더 다녀오셨다. 내가 같이 가지 못해 죄송하게도 인솔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오전에 장시간 누워있으니 기력이 조금 회복되었다. 전날에 이어 라파스를 관광하고, 저녁에는 야간 버스로 우유니 사막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이미 전날 조금 둘러보았으니 이날도 우리끼리 구경하려고 했는데, 둘 다 몸상태가 좋지 않으니 그냥 현지인 가이드가 하는 시티투어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 닐 암스트롱이 볼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이곳을 보고 달 같다고 하여 달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나는 달에 가보지 않았으니 그건 알 수 없지만, 터키의 카파도키아가 떠오를 정도로 신비한 곳이었다.
칠레 아따까마 사막의 달의 계곡(NASA 훈련지)에 비하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꽤 멋졌다. 사실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현재 칠레 영토인 아따까마의 일부는 본래 볼리비아의 영토였다.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아따까마 사막 지역(광물자원이 많은 지역)을 칠레에 빼앗기면서, 바다로 가는 길목 역시 잃었다. 칠레 달의 계곡 역시 볼리비아의 영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볼리비아 입장에서는 칠레 영토가 된 아따까마 사막을 바라볼 때 기분이 좋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복잡한 시내 밖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니, 묘한 지형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달의 계곡 구경을 마친 후, 다시 시내로 돌아와 무리요 광장으로 갔다. 나와 엄마는 이미 전날 갔었기 때문에 사진은 많이 찍지 않았고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했다.
전날부터 궁금했던 국회의사당의 시계에 대해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가이드는 저 시계가 볼리비아의 자주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북반구와 남반구는 모든 것이 반대로 움직이는데, 이 세상은 모두 북반구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볼리비아에서는 남반구의 방식, 즉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가이드의 이 말은 나중에 에콰도르 키토의 적도 박물관에서 더 잘 이해가 되었다. 북극에서 적도를 향해 서 있을 때와 남극에서 적도를 향해 서 있을 때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은 다르게 보인다. 북반구 입장에서는 시계방향이지만, 남반구 입장에서는 반시계 방향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북반구와 남반구라는 말도 관점의 차이 아닌가.
저 시계는 북반구 중심의 세계질서를 무분별하게 따르지 않겠다는 볼리비아의 의지를 나타낸 중요한 상징물인 것이다.
무리요 광장 다음으로는 볼리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인 하엔 거리(Calle Jaen)로 향했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 표면은 예쁘지만 슬픈 역사를 지닌 거리였다.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가 살던 집도 있었고, 각종 박물관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악기 박물관, 황금 박물관, 미술관 등을 비롯해 전쟁 박물관도 있었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칠레와 싸웠던 태평양 전쟁 박물관이라고 했다.
볼리비아는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아따까마 사막 쪽 영토를 칠레에 빼앗긴 이후로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볼리비아에는 여전히 해군이 존재한다. 해군은 티티카카 호수를 관리하며 그곳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언젠가 바다를 되찾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바다는 교역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며 광물자원의 원천일 뿐 아니라 명예의 문제이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다. 실제로 인당 GDP도 가장 낮고, 체감상으로도 그렇다. 부패지수가 높은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볼리비아 정부에서 표방하는 자주성이니 의지니 하는 것들이 그 순간에는 멋져 보여도, 케이블카 안에서 끝도 없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산비탈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때에는 뜬구름 잡는 사치 같았다. 국회의사당의 반시계와 호수에서 훈련하는 해군은 실질적인 행동이나 해결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켜내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행위는 응원하고 싶다. 비록 지금 가진 거라고는 절벽과 황량한 사막뿐이지만, 역사를 잊지 않고 한 발짝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간 반전을 이뤄낼 수도 있지 않을까.
# 사소한 메모 #
* "나는 죽을지 모르나, 내가 불타오르게 한 자유의 횃불은 결코 끌 수 없을 것이다." -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
* 달의 계곡에서 내 모자가 날아가 코앞에, 하지만 꽤나 깊은 곳에 떨어졌다. 아쉽지만 위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커다란 막대기를 들고 나타나 모자를 건져주셨다.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 모자는 절대 잃어버리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