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 칠레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
드디어 이번 남미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파타고니아 여행이 시작되었다. 추운 곳, 눈 쌓인 곳을 좋아하는 나는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와 아르헨티나의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를 보는 것을 상당히 많이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날이 이토록 험난할 줄이야.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비가 조금 내렸고 안개가 조금 꼈지만 기체가 많이 흔들리지는 않아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곧 착륙한다던 비행기가 20여분 뒤 다시 추진력을 내어 위로 올라가더니, 푸에르토 나탈레스가 아닌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 공항에 착룩했다. 여기서 나는 잠시나마 국가 재난 사태의 축소판을 경험해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푼타 아레나스에 내린 비행기는 잠시 기다리라는 방송과 함께 사람들을 대기시켰다. 아무리 봐도 안개도 비도 심한 편이 아니라서 다시 이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후에 창 밖을 보니 이미 수화물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체념하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다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다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출발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약 10분 뒤에 다시 안내를 해주겠다면서. 이미 짐을 내리는 걸 봤는데, 내 짐이 지금 저 멀리 가고 있는 걸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야!라고 속으로만 외쳤다.
두 번째.
항공사에서는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가는 버스 편을 제공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저녁 7시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가 내린 시간은 오후 3시. 우리 인솔자와 몇몇 다른 사람들이 강력하게 항의한 끝에 버스 시간은 4시로 앞당겨질 수 있었다. 애초에 가능한 걸 항공사는 불가능한 것처럼 말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 걸 우리가 가능하게 만든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4시간 동안 대기했다면 더 피곤했을 것이다.
세 번째.
항공사에서는 푼타 아레나스 공항에서 사용할 수 있는 6900페소(약 1만 원) 짜리 바우처를 주었다. 점심식사를 하라는 거였는데 (시간은 이미 3시가 넘었다) 문제는 공항 내 몇 안 되는 가게들 중 문을 연 곳이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였다. 모두들 그곳에 가서 줄을 섰는데, 샌드위치의 개수가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샌드위치는 2500페소밖에 안 했는데 가게에서는 샌드위치로밖에 교환해줄 수 없다고, 물이나 음료는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샌드위치가 다 떨어진 다음에는 물과 음료수로도 바꾸어 주었다.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무리 국내선이라지만 한 비행기에 가득 차게 타고 있던 사람들 전부가 고작 20개 남짓 있는 샌드위치를 위해 줄을 서 있으니,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못 살 판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앞쪽에 줄 서 있는 사람 한 명에게 바우처를 몰아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 한 명은 바우처 5~6개로 샌드위치를 사재기하듯 사갔다. 다른 한국인 팀이었다. 한국인들이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이 다 들려서 더 마음이 상했다. 나는 다행히 비교적 앞쪽에 서 있어서 겨우 살 수 있었는데, 사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졌다.
카오스 그 자체였던 공항을 벗어나, 마침 우리를 태우러 온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를 잡고 드디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무는데, 정말 너무 심각하게 맛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와 둘이 허탈함에 웃었다. 식빵 사이에 치즈 한 장, 햄 한 장 들어 있는 것이 전부였는데 아무 맛도 안 나도 빵도 퍽퍽했다. 이걸 먹겠다고 그렇게 서로 마음 상하고 그랬던 건가, 자괴감이 들었다. 혹 나만 피해를 입을까, 서로 지나치게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조급함과 불안함, 답답함은 사람을 참 희한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저녁 8시에 드디어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했다. 극지방에 가까워서인지 밤 9시 반부터 석양이 지기 시작해 10시가 되어서야 어두워졌다. 마을도 예쁘고 밤늦게 해가 지는 것 역시 신기했지만 피곤하므로 구경은 다음날 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몸도 마음도 지친 하루였다.
그래도 맛있는 저녁식사로 기운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빠리샤(Parrilla)와 빠일라 마리나(Paila Marina)를 먹었는데 둘 다 만족스러웠다. 빠리샤는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등을 그릴에 구운 모둠 구이처럼 나왔는데 양도 많고 고소했고, 빠일라 마리나는 우리나라 해물탕과 비슷한 맛이 나는 해산물 수프였는데 개운해서 계속 떠먹었게 되었다. 식당에 도착한 것은 9시경이었지만 남미 대부분의 식당에서가 그렇듯,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저녁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 사소한 메모 #
* 얄미운 변수는 지나고 나면 가장 큰 추억이다.
* 영화 ‘컨테이전'이 생각나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