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의별 Apr 10. 2017

회색빛에서, 거짓말처럼

Day 16 -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토레(torre)는 탑, 파이네(paine)는 푸른색을 뜻해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는 결국 푸른 탑을 뜻한다. 산 봉우리가 독특한 색을 띠고 있어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날씨가 환해야 그 색을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아침부터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

전날 비행기가 다른 곳에 내리는 등 날씨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던 지라, 제대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물론 아쉬움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나 파타고니아 지역은 내가 남미 여행에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각자 잠을 보충하며 조용히 갔다. 그러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져 창밖을 보니, 저 멀리 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말도 안 되게 그 순간 점차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구름은 저 멀리까지 밀려나, 오른쪽 옆에 탑처럼 서 있는 것들까지 보였다.

라마과의 과나코

금방 사라져 버릴까 우리는 서둘러 내려달라고 외쳤다. 전망대는 따로 있었지만, 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날씨가 갑자기 바뀐 것이 믿을 수 없었다.

Laguna Sarmiento

한참 사진을 찍고, 다시 차를 타고 조금 더 가서 호숫가에서 다시 내렸다. 호수와 함께 보이는 전망도 멋졌다. 다행히 그 이후로도 날씨는 계속 맑아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의 행운일까 봐 조급해했는데, 그 이후로는 계속 볼 수 있었다.

트레킹하는 사람들

드디어 호텔에서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이곳에서는 트레킹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고민을 했었는데 체력적인 부담도 되고, 엄마와 함께 해야 하니 그에 대한 부담도 커서 포기했다. 당시에는 날이 흐려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산봉우리들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크게 아쉬움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트레킹을 하는 것이 토레스 델 파이네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아주 일부만 볼 수 있었지만, 트레킹을 하면 깊숙이 들어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입구에 들어서서 폭포를 보러 갔다. 그쪽에서는 또 다른 방향에서 산을 볼 수 있었는데, 꾸에르노 델 파이네(Cuernos del paine)라고 했다. 꾸에르노(Cuerno)는 뿔을 뜻한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색이 마치 어딘가에 담가놓았다 뺀 것처럼 달라서 신기했다.

폭포는 규모가 작지만 색이 예뻤다. 보통 폭포 쪽에는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어서 춥다고 했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바람이 거의 안 불어 춥지 않았다. 오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날씨였다.

적당히 구경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페오에(Pehoe) 호숫가로 갔다. 나무 벤치와 테이블에서 각자 싸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곳은 점심을 사 먹기가 어려워 전날 미리 장을 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싸왔다. 먹다가 아마딜로도 보았는데 난생처음 보는 거라 신기했다.

식사 후 호숫가로 걸어 내려가 보니 전망이 정말 좋았다. 물과 새들과 산까지.

여전히 하늘에 구름이 많았지만 군데군데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구름들이 더 이상 산을 가리고 있지 않으니, 신비롭고 멋졌다.

이 날 당일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그레이 빙하였다. 꽤 가까이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물가가 예뻤고, 걸어 들어가는 숲길도 예뻐서 좋았다.

왼쪽과 오른쪽 산 사이에 보이는, 옅은 푸른 빛이 띠는 회색 부분이 그레이 빙하이다.

그레이 빙하를 가까이서 보려면 카약을 타고 건너가야 된다고 했다. 아쉽지만 빙하는 이틀 뒤 아르헨티나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로 대신하기로 했다.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토레스 델 파이네를 제대로 본 것으로 이날은 만족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오후 5시 정도 되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4시간 넘게 남은 시간이었다. 전날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푸에르토 나탈레스 동네를 조금 돌아보기로 했다. 바닷가를 걷고 있으니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가 생각났다.

바닷가를 따라 쭉 걸어보니 멸종된 동물인 밀로돈의 동상이 있었다. 나무늘보, 개미핥기, 아마딜로와 친척인 동물인데 이 근처 동굴에서 밀로돈이 파타고니아 지역에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햇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물이 예뻤다. 영화 속에 나올 법한 풍경들이 보였다.

바닷가 외에도, 조용하고 예쁜 마을이었다. 사실 전날 날씨가 흐렸음에도 마을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는데, 날이 환하니 더 예뻐 보였다.

산책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칠레식 스테이크인 로모 알로 뽀브레(Lomo a lo pobre, 스테이크 위에 계란 프라이가 얹어지고 감자튀김이 함께 나오는 식사)와 킹크랩 플래터를 주문했다. 킹크랩 플래터는 살이 생각보다 통통해서 굉장히 맛있었고, 스테이크도 정말 맛있었다. 양도 많았는데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한 후 숙소에 들어가서 쉬다가 9시 반에 석양을 보러 다시 나갔다. 9시 반에 해가 지는 곳이라니. 하늘도 셔벗 색이어서 참 예뻤다.


 
# 사소한 메모 #

* 잘 나온 사진보다 마음이 느껴지는 사진이 더 좋다. 멋지고 예쁘게 나온 사진보다 그 순간의 감정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이 더 좋다.
* ♬ Westlife - Colour my worl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