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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15. 2017

낭만을 찾아, 세상의 끝

Day 19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Ushuaia)

우수아이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공항에서부터 설산이 보이는 곳이라니. 페루 쿠스코 이후로 두 번째로 감동은 느꼈다. 정말 예쁜 도시라고, 살아보고 싶다고.


나는 겨울이 좋다. 겨울에 딱히 스키장에 간다거나 눈사람을 만든다거나 설산 하이킹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겨울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좋다. 불빛에 반짝이는 하얀 눈, 입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피어나는 김,  따뜻한 스웨터. 그래서 추운 곳, 눈이 쌓인 곳, 빙하가 있는 곳들을 좋아한다. 그러니 마을 바로 뒤에 1년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설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대부분 우수아이아에 가면 비글해협에 가거나 펭귄 섬까지 다녀오는 투어를 신청하곤 한다. 하지만 나도 엄마도 비글해협 등대가 나오는 영화 ‘해피투게더’를 보지도 않았고 바다사자나 펭귄 등은 이미 바예스타 섬에서 본 데다 갈라파고스까지 갈 예정이었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투어를 신청할 돈으로 차라리 점심으로는 해산물 빠에야를, 저녁으로는 킹크랩을 먹기로 했다.

La Cantina Fueguina de Freddy

빠에야 맛집을 검색하니 식당 한 군데가 나와 그곳으로 갔다. 2인분 빠에야를 주문하고, 드디어 음식이 준비되었는데, 밥을 한 숟갈 떠보니 무슨 포장지 재질의 이물질이 손톱만큼 나왔다.

첫 번째 빠에야 → 두 번째 빠에야

그냥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그것만 제거하고 먹을 생각이었는데, 직원은 곧장 새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배고픔을 참고 기다렸더니 더 풍성하게 가져다주었다. 처음과 비슷한 양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빠에야에는 홍합, 문어, 관자, 대게 등등 엄청나게 다양한 해산물이 들어가 있었다. 밥반 해물 반이었다. 주인인지 그냥 직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옆 테이블에 대게를 먹는 한국 분들이 있었는데 맛있다고 하기에 저녁에는 몇 시에 여는지 물어봤다. 직원이 웃으면서 저녁에 다시 보자고 했다.

사실 우수아이아의 진짜 낭만은 '세상의 끝'이라는 별명에 있다. 해남 땅끝마을에 가는 것처럼, 에콰도르 키토의 적도 박물관을 찾는 것처럼,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 하지만 그런 의미와 상관없이, 흐린 날씨와도 상관없이, 이 마을은 그 자체로 특별하고 예뻤다. 만년설이 내려앉아 있는 산이 뒤에서 마을을 감싸고, 앞에는 너른 바다가 있으니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은 마을을 자세하게 구석구석 보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더 좋았다. 우리는 계단을 조금 걸어 올라가 바닷가 전망을 보고, 또 밑으로 내려가 바닷가를 따라 걷기도 했다.

알지 못하는 타인들의 사랑의 추억들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분명 누구든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이 해안을 걸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끝내 고백하지 못했던 첫사랑과 함께, 오랜 친구와 함께,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배우자와 함께. 어쩌면 둘이 걷던 이 길을 이제는 혼자서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추억들이 대신 떠올랐다.

걷다 보니 난파선 같은 배가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세상의 끝 박물관'에서 보니 실제 옛날에 가라앉은 크루즈선을 모티브로 해놓은 것 같았다. 다른 데서 온 크루즈가 우수아이아에 들렀다 다시 출발했는데, 출발한 지 45분 만에 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선장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모두 살아남았는데, 그 사람들은 난민처럼 우수아이아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입장료가 1인당 1만 원이 넘었는데 볼 내용은 그거 말고는 없었다.

하루 종일 마을만 몇 바퀴 돌며 구경해도 좋겠지만, 나에게는 우수아이아에서 꼭 하고 싶었던 세 가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미션을 클리어하러 갔다. 

우선 첫 번째, 백 년 카페에서 초코 라테 마시기. 이름 그대로 백 년 된 카페이다. 원래는 잡화점이었는데 지금은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카페 곳곳에 오래된 물건들을 전시해놓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이곳의 초코 라테는 따뜻한 우유에 잠수함 모양 초콜릿을 넣어 녹여먹는 것으로 유명한데, 얼마 전부터 바뀐 것인지 아쉽게도 잠수함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초콜릿 모양이었다. 우유의 양에 비해 초콜릿은 작아서 생각보다 달지는 않았지만 은은하게 맛있었다.

두 번째, 엽서 보내기. 그저 낭만에 의한 위시리스트였다. 이곳에서 보내든 어디서 보내든 받는 사람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을 텐데,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 나는 이곳에서 꼭 엽서를 한번 보내보고 싶었다. 엽서보다 우표가 더 비쌌고, 약 45일 뒤에 한국에 도착했다. 나 자신을 위해 엽서 하나 썼어도 좋았을 텐데, 이런 아이디어는 늘 그곳을 떠난 뒤에야 떠오르는 법이다. 

대망의 세 번째는, 킹크랩 먹기. 점심에 빠에야를 먹었던 곳으로 다시 갔는데 직원이 반갑게 알아봐 줬다. 1.3kg짜리로 골랐는데 정말 맛있었다. 특히 살이 통통하게 꽉 차 있어 먹을 게 많아서 좋았다. 지금까지 먹어본 킹크랩 중에 최고인 것 같다. 다 먹고 계산하려니 직원이 장난스레 웃으면서 내일 또 오라고 했다. 우수아이아에서 머문 시간이 길지 않다 보니 3끼를 모두 같은 식당에서만 먹을 수는 없어 다시 가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그 식당 앞을 지나가니 직원이 또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우수아이아 여행의 기억이 더 좋아졌다.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숙소로 발길을 돌렸더니 해안가 구름 뒤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이 마을을 보면서 더 이상 예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구름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니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사소한 메모 #

* 언젠가 한 번쯤은 설산이 보이는 이런 마을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 ♬ 가을방학 - 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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