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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16. 2017

그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Day 20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Ushuaia)

우수아이아에서 비글해협 투어나 펭귄 섬 투어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국립공원에 방문하는 것. 이 국립공원을 구경하는 방법 또한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택시를 예약해서 중요 포인트마다 내려 조금씩 걸으며 구경하고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는 방법, 두 번째는 기차를 타고 구경하는 방법, 세 번째는 하이킹을 하는 방법. 우리는 오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동을 해야 했기에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걸 볼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을 택했다.

가장 먼저 국립공원 내에 있는 기차역을 구경했다. 오래전 죄수들이 팬 목재를 도시로 옮기는 역할을 했던 기차인데 지금은 관광객을 태우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세상의 끝 기차'라는 말이 또 한 번 가슴속 낭만적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이 기차를 타면 공원의 깊은 내부까지는 구경할 수 없어 다시 택시로 돌아갔다.

그동안 보았던 대자연과 이후에 보게 될 대자연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국립공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이 거의 건드리지 않은 그대로의 깊은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호수, 숲, 산, 바람. 자신 있게 내세울 한 가지는 없지만, 꽤 괜찮은 것 열 가지를 지닌 좋은 사람처럼.

로까 호수 (Lago Roca 또는 Lago Acigami)

굉장히 큰 로까 호수(Lago Roca)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에 위치해있었다. 반대편에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칠레이다. 아르헨티나는 우수아이아를 지켜내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는데, 남극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우수아이아만 툭 잘라낸 것처럼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Rio Lapataia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도시에서 벗어나 칠레와의 국경에 위치한 이 드넓은 자연을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 같다. 이 속에서 우리는 호수도 보고 강도 보고 숲길도 걸었다. 토끼가 뛰어가는 것도 보았다. 계속 바쁘게 이동을 거듭하고, 투어 가이드들을 쫓아다니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보아야겠다', '무언가를 해야겠다' 등의 특별한 목적이 없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오전이어서 그런지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호수에 비친 산과 구름들, 키가 큰 풀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 흐린 날씨에도 간간히 전해오는 햇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을 잠시나마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중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굉장한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국립공원 내에 있는 '세상의 끝 우체국'에 들렀다. 내내 흐리고 쌀쌀하더니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급격하게 날이 맑아졌고 따뜻해졌다. 전날 이미 마을에서 엽서를 부쳤지만, 이곳이 가장 최남단에 있는 우체국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아주 잠시 아쉬웠지만, 어차피 받는 사람은 우수아이아가 어디 있는 곳인지도 잘 모를 거라는 생각에 바로 잊어버렸다.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우체국에서 우수아이아 여행을, 그리고 파타고니아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동할 시간. 다시 한번 도시 여행이 시작될 차례였고, 한 동안 파타고니아에서 느낄 수 없었던 남미의 극한 더위에 괴로워질 시간이 왔다.


# 사소한 메모 #

* 유명한 랜드마크가 없는 관광지도 좋다. 남들이 밟고 간 길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남들이 찍고 간 사진을 따라 찍지 않아도 된다.
* 이틀간 산책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았다. 언젠가 꼭 다시 가서 하루에 엽서 한 통씩 쓰며 30일 정도 있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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