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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16. 2017

모든 여행지가 최고일 수는 없으니까

Day 21, 22-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대개 여행을 가면 무조건 멋질 거라는 기대를 하곤 한다. 집과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부터가 설렘의 시작이니까. 하지만 처음 가보는 곳이라고 해서 무조건 색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색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멋진 것도 아니다. 타인이 찍은 사진은 여행지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되어줄 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여행지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건물 밖에 그려진 에비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볼 게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그래서 여행사 제공 일정이든 자유여행 일정이든 대부분 3박 미만은 없다. 우리 역시 3박 4일을 있었다. 여행 출발 전 블로그 등을 검색한 바로는, 4박 5일을 있어도 모자란 도시라고 했다. 

5월의 광장(Plaza de Mayo)

그러나 나에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3박은커녕 2박도 지루한 도시였다. 도시에 볼게 많고 적고는 중요치 않았다.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답게 유럽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이 도시는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비슷한 모습의 산티아고에서는 1박밖에 하지 않아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더위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이 도시의 공기가 너무나 답답해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직역하면 '좋은 공기'라는 뜻이다.

대성당 내부에 있는 산 마르틴 장군(남미 해방에 앞장 선 인물) 무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그 당시에는 지치고 재미가 없어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던 곳이었음에도 지금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산 마르틴 광장(Plaza San Martin)
보태닉 정원(Botanic garden)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지하철에는 에어컨이 없다

엄마와 나는 둘 다 더위에 상당히 약하다. 둘 다 땀이 많이 나서(정말 많이 나서) 더운 곳에 있으면 금방 지친다. 첫날은 호텔 근처 광장을 돌아볼 예정이어서 대부분 걸어서 구경을 했지만 둘째 날에는 조금 더 멀리 나갔다. 일반적으로 택시비가 비싼 편은 아니지만, 갔을 당시 공사 중인 구간들이 있어 길이 너무 많이 막혔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보기로 했는데, 이 덥고 습한 도시의 지하철에 에어컨이 없었다. 바깥과 비슷한 수준의 온도와 습도에 기겁한 엄마와 나는 있는 종이를 모두 꺼내어 끊임없이 부채질을 해댔지만 다른 사람들은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 

라 보카(La Boca) 지역 까미니또(Caminito) 거리
피아졸라 탱고쇼

탱고의 나라에 탱고 추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이건 내 탓일지도 모른다. 라 보카(La Boca) 지역의 까미니또(Caminito) 거리를 걷다 보면 탱고 추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던데, 우리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이곳이 위험한 지역이라서 보통 오전에 일찍 갈 것을 권하는데, 생각해보면 누가 아침부터 탱고를 추겠는가. 길거리 탱고를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거리는 예뻤지만, 역시나 남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나마 피아졸라 탱고쇼에 다녀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공연 전 몇몇 스텝을 알려주기도 하고(몸치라 따라 할 수는 없었지만) 식사도 푸짐하고 맛있었다. 공연이 멋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춤도 음악도 노래도, 단 한순간도 딴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3초에 한 번씩 'Cambio'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다

'깜비오(Cambio)'는 exchange, 즉 환전을 뜻한다. 유독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에는 환전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환전이 돈을 가장 쉽게 벌 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3초에 한 번씩 여기저기서 깜비오를 외쳐댄다. 이 사람들에게 환전을 하겠다고 하면 골목 안쪽에 있는 환전소로 데려가 환전을 하게 해준다고 한다. 깜비오 다음으로 많이 들리는 말은 시티투어, 탱고쇼 티켓 판매 등이다.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은 사진이 전부다

오페라 극장을 서점으로 바꾸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 된 엘 아테네오. 오페라 극장을 바꾸었다는 아이디어 자체도 놀랍고 서점도 물론 예쁘기는 하지만,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가 그냥 서점일 뿐이었다. 그전에 검색을 통해 보았던 사진들이 전부였다.

밑에서 한 번 더 등장할, 아르헨티나식 스테이크인 아사도(Asado)를 하는 유명 빠리샤(Parilla)집 '라 브리가다(La Brigada)'

이틀 사이에 3번의 정전을 경험했다

첫날은 밤에 도착하고 넷째 날에는 오전에 떠났으니, 둘째 날과 셋째 날 이틀을 여행한 셈이다. 둘째 날 오전과 낮에 관광을 마치고 너무 더워서 잠시 쉬려고 약 3시쯤 숙소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와이파이도 안 되고 전화도 안 되고 엘리베이터도 안 되고. 8층에 묵었는데 걸어서 내려가야 하나 잠시 걱정했다.

셋째 날에는 점심에 햄버거를 먹으러 갔는데 식당에서 갑자기 정전이 되어 선풍기도 안 나오고 불도 안 켜졌다. 햄버거를 이미 주문한 상태라 나갈 수도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빠리샤(Parilla) 집에서도 정전이 되었다. 사실 여기서는 2번이나 끊겼으니 총 4번의 정전을 경험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마지막 정전 때는 식사를 다 마친 후여서 계산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사라져 버릴까 했으나 2층에 앉아있어서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레콜레타(Recoleta) 묘지
'에비타(Evita)', 에바 페론(Eva Peron)의 묘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잘 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레콜레타(Recoleta) 묘지이다. 에비타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몇 억원이 있어야지만 묻힐 수 있다는 부촌 묘지이다. 너무 지나치게 화려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밖에는 지붕조차 없는 빈민들도 많은데, 이 사람들은 죽어서도 잘 사는구나.

빠리샤 뻬냐(Parilla Pena)의 아사도. 립아이를 주문했다.
라 브리가다(La Brigada)의 아사도. 숟가락으로 잘라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등심과 갈빗살을 주문했다. (정전을 두 번 경험한 집)
라 브리가다(La Brigada)의 아사도. 숟가락으로 잘라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등심과 갈빗살을 주문했다.팔레르모 소호 지역에서 먹은 햄버거 (대낮에 정전을 경험했던 집)

그리고 식당 및 음식 관련 여담

아사도는 아르헨티나식 소고기 요리인데, 스테이크와 비슷하다. 아사도를 하는 가게를 보통 빠리샤(Parilla)라고 부른다. 아사도를 두 번 먹었는데 한 번은 점심에 비교적 저렴한 곳에 가서 립아이를 먹었고, 다른 한 번은 녁에 꽤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등심과 갈빗살을 먹었다. 두 곳 모두 정말 맛있게 먹었다. 고기가 두툼한데 부드럽다. 특히 두 번째 간 집은 숟가락으로 고기를 썰어서 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부드럽긴 하지만 그 정도로 부드럽진 않았다. 그래서 엄마와 둘이 숟가락을 자세히 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햄버거의 경우 그냥 걷다가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사실 원래 우리가 가려고 했던 유명한 햄버거 맛집이 있었다. 분명 휴대폰에 약도를 저장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길을 몇 번을 왔다 갔다 해보고 중간중간 현지인들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와이파이 되는 곳도 없어서 찾아볼 수도 없었다. 더위에 지쳐 결국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맛도 그냥 그렇고 정전돼서 더워 죽을 뻔했다. 나중에 에콰도르에 가서 엄마가 수줍게 고백했다. 지금 보니 휴대폰에 약도가 저장되어 있다며.


# 사소한 메모 #

* 여행이 곧 여행지는 아니다. 여행지와 상관없이 여행은 계속되며 에피소드들이 만들어진다.
* 나는 더운 곳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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