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5 - 미국 뉴욕(New York City)
뉴욕은 볼 것도 많고 사람도 많은 바쁜 도시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여행 방법이나 모습이 굉장히 달라질 수 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꼭 하고 싶은 것들이 세 가지 있었다. 그리고 뉴욕 도착 둘째 날, 그 세 가지를 모두 하는 완벽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 소장품만 보고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미술관의 외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소를 들고 찾아갔는데 입구에서 나는 미술관인 줄 몰랐다. 그동안 유럽에서, 남미에서 주로 미술관에 갔었기 때문인지 당연히 큰 기둥들이 서 있는 그리스식 건물을 상상하였던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곳은 뉴욕이라고. 그리고 현대미술관이라고.
깔끔하고 굉장히 넓었다. 나는 맨 위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가면서 보기로 했다. 6층까지 있었고, 맨 위층인 6층은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지만 저 말이 마음에 들어서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4, 5층의 상설 전시실들. 잭슨 폴락, 샤갈, 달리, 고갱, 고흐 등등 다양한 소장품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들이 많아서 한 발자국 내딛으면 한참을 서 있다가 다음 발자국을 내딛곤 했다.
그러나 이 미술관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장품을 고르라 하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피카소의 '아비뇽 처녀들'이 아닐까. 교과서에서, 인터넷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서 무언가 날아오르듯이 설레는 그림들이 좋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한창 미술관에 빠져들었을 때 나는 좋아하는 그림들을 모두 열심히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찍은 사진들을 다시는 찾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인터넷에 검색하면 훨씬 더 화질이 좋은 사진을 찾을 수 있고, 그림을 사진으로 다시 찍는 것 자체가 상당히 무의미한 일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미술관의 분위기와 사람들, 어떤 그림 옆에 어떤 다른 그림들이 있었는지를 남기고 있다.
생각보다 현대미술관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서 점심 먹을 시간이 애매해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몇 달 전에 미리 예약해두었던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러 갔다. 언젠가 뉴욕에 가게 된다면 이것만큼은 꼭 보고 오겠노라 다짐했던 뮤지컬이다.
시작과 동시에 'Circle of life' 노래가 나오자, 나는 가슴이 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들떴다. 그리고 무대의 연출력을 보며 또다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동물로 분장을 하고 연기를 한다는 것이 어색하고 유치할 수도 있는 것인데, 우려와는 달리 너무도 완벽하게 연기했고 장면 하나하나를 그에 알맞게 연출했다. 멋지고 재미있는 것을 넘어서 어릴 적 추억을 다시 되살려주는 동시에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그 여운에 흠뻑 취해있을 때, 갑자기 하이에나 중 하나를 연기했던 여자 배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라며. 처음 공연장에 입장할 때 나누어주었던 팸플릿에도 오늘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문구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무대 위에 있는 여성 배우들이 맨 앞으로 서더니, 마이크를 잡은 여배우가 이 극장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무대 위로 불렀다. 그중에는 내 표를 검사했던 할머니도, 화장실을 청소하던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녀는 'These are the women who make this show possible 7 days a week(매일 공연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여성들 덕분입니다)'라며 그녀들과 여성 관객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낼 것을 유도했다. 마지막까지도 멋지고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천천히 나와보니 해가 지려고 하고 있기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걸어갔다. 맨해튼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대표적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록펠러센터가 있는데, 요즘은 록펠러센터를 더 많이 찾는 것 같다. 내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간 것은 오로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보면서 해질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올라가 보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늦게 올라가 석양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지막에 타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다.
전망대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추웠지만, 꿋꿋하게 서서 해가 건물들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다 보고 야경이 시작되려는 모습까지 보고 내려왔다.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도시의 야경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전에 해가 지는 순간의 도시는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공허해 보인다고. 태양이 마지막으로 강렬한 힘을 내어 하늘을 물들일 때 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어둡고 쓸쓸해 보인다.
그리고 자연의 불빛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인간의 불빛이 힘을 얻는다. 태양이 불타오르는 동안 숨겨두었던 것을 각자 조금씩 꺼내어놓듯, 그렇게 서서히 예쁘게 도시는 다시 빛을 되찾는다.
조금 더 늦은 시간까지 있었다면 더 화려해진 야경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야경을 보는 것은 다른 날을 기약했다. 전망대에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겠다는 것은 달성했으니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여러 가지 색으로 계속 변한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올려다보았을 때의 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주황색이었다. 완벽한 하루였다.
# 사소한 메모 #
* 어렸을 때의 추억이란 굉장한가 보다. 토이스토리 3편을 보면서 혼자 울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 '... then he held my hand. At one point I looked down and I couldn't tell which fingers were his and which were mine. And I knew... It was magic.' -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중
* ♬ Lion King OST - Hakuna Mat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