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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과 화려함의 경계에서

Day 38 - 미국 뉴욕(New York City)

by 바다의별

전날 눈이 오고 나서, 생각보다 따뜻했던 뉴욕의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가지고 있는 옷들을 최대한 껴입고 한겨울 패딩까지 걸쳤는데도 불구하고 바람까지 많이 부는 꽤나 추운 날이었다. 하지만 뉴욕 일정 막바지였고 다음날 기온은 더 떨어진다고 하여 원래 계획대로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대신 해가 질 무렵 저녁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의 야경을 보려 했던 계획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브루클린 브리지 건너편에서 반짝이는 맨해튼의 야경을 보고, 어두워진 직후 숙소로 돌아가는 것으로 계획은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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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브루클린으로 향하기 전에 9/11 메모리얼 파크에 먼저 들렀다. 눈이 쌓였을 때에는 따뜻해 보였던 도심이, 흐리고 추워지자 어둡고 쓸쓸해졌다. 장소도 장소인지라 마음까지 더 추워졌다.

DSC04669001.JPG 9/11 테러 메모리얼 파크

한때 거대했던 두 개의 쌍둥이 빌딩이 이제는 터가 되었다. 마음 한 구석을 후벼 파듯 터의 안쪽으로 깊숙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소리가 나서 참 좋았다.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니 이름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마음이 더욱 진지해지고 경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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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나 보다. 끔찍한 테러의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이름 앞에서, 웃으면서 셀카를 찍는 사람들을 여럿 목격했다. 추모를 위해 만들어진 곳을 단순 관광지로 전락시켜버리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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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얼 파크를 한 바퀴 돌아본 뒤, 근처에 있는 월스트리트의 황소상과 배터리 파크에도 들렀다. 모두 일부러 간 곳들은 아닌데, 근처를 슬슬 둘러보니 발길이 닿았다. 배터리 파크에서는 자유의 여신상이 저 멀리 보였다. 자유의 여신상은 아주 어릴 적 올라가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언젠가 뉴욕에 다시 간다면 원래 타려 했던 저녁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의 석양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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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서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브루클린에 도착했다. 브루클린 역시 다리를 직접 걸어서 건너볼까 했으나 날이 너무 추워서 그냥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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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산책로로 걸어가 보니 로어 맨해튼의 전경이 보였고,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의 형상도 작게 보였다. 구름이 많이 드리워져 있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도시가 어두웠다. 겨울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춥고 바람이 부는 날 어두운 도시를 보고 있으려니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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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다 보니 구름이 덜한 곳들이 있어 가끔씩 조금 밝아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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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들이 있는 페블비치도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강가에는 사람이 없어 한적해서 좋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나중에 다시 돌아와 야경을 보기로 하고, 브루클린 덤보 쪽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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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덤보 지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이곳이다.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브루클린 브리지, 그리고 그 교각 사이로 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사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꽤 오랜 시간 기다린 후에 찍은 사진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앞에서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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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보에서 사진을 찍은 뒤 브루클린 브리지 위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다리를 떠올려보면 차도가 가운데로 지나고 인도가 양 옆 끝에 나 있었던 것 같은데, 이곳은 반대였다. 덕분에 한가운데 길을 걸어갈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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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수교라는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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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브리지 안에 들어가니 케이블 때문에 전경이 잘 보이지 않아 반쯤 걸어간 뒤 되돌아 나왔다. 생각해보면 절반 이상 지난 지점에서 맨해튼이 더 잘 보였을 텐데, 너무 추웠던 나머지 생각이 짧았고 인내심이 부족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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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서 다리에서 황급히 내려온 뒤, 따뜻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핫초코에 초코칩 쿠키를 주문해놓고 일기를 쓰려고 했으나 손이 얼어붙어 쓸 수가 없었다. 핫초코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녹인 후에야 비로소 펜을 들 수 있었다. 초콜릿을 그대로 녹인 듯한 단 핫초코를 끝까지 마신 후 슬슬 해가 질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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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태양의 마지막 빛은 강렬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도시의 건물들은 더욱 엄숙해졌다. 곧 있으면 이 분위기가 반전될 것이라는 걸 알듯, 건물들은 묵묵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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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는 30분이 더 걸렸다. 햇빛이 점점 사라지니 더 추워졌지만 야경을 보지 않고서는 되돌아갈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쓸쓸한 도시만을 바라봤는데, 화려한 도시까지 보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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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으며 걸어 다니던 중 드디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건물들이 슬슬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되살아나는 건물들을 보니 추위에도 불구하고 나도 같이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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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더 어두워짐에 따라 불빛들은 더 선명해졌다. 하루 종일 어두웠던 도시가, 아이러니하게도 햇빛이 사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진 뒤에야 빛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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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시는 반짝인다. 하늘의 별들을 무참히 덮어버릴 정도의 도시의 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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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메모 #

* 별을 보기 위해서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잠깐의 어둠을 참아낸 뒤 내가 그대를 찾는 것처럼 그대도 나를 찾았으면 좋겠다.
* ♬ Ed Sheeran - Thinking out 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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