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보니 벌써 몇 달을 달렸는데 데스티니에 대해서는 별로 쓴 게 없는 것 같아 짧게나마 요약해봅니다.
물론 FPS죠. 근데 은근하게나마 액션 게임의 느낌도 꽤 납니다. 전 사실 FPS에는 그닥 애착이 없어요. 재미난 것들도 있긴 했지만 제가 맹렬하게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죠. 그에 비해 액션 게임은 꽤 좋아해요. 근데 데스티니는, 물론 FPS이긴 한데, 액션 게임의 느낌이 꽤 가미되어 있거든요. 이 게임이 저를 매료시킨 부분에는 이런 점도 꽤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데스티니의 어떤 점 때문에 액션 게임의 맛이 은은하게 또는 은근하게 나는가하면, 크게 두 가지 요소 때문이라고 봐요.
다양한 유틸기들이 첫번째 이유. 눈뽕 수류탄(플레시뱅)이나 평범한 그레네이드 등 FPS에 흔히 있을법한 스킬 이외에도 점프해서 적을 향해 - 수퍼맨의 자세로 - 날아가 광역 데미지를 주는 스킬이라거나, 일시적이나마 투명해지는 은신, 나와 아군 모두를 보호하고 버프를 주는 광역 보호막, 다양한 특징들을 가진 서로 다른 밀리 스킬 등등의 여러가지 흥미로운 스킬들이 존재하고, 이들의 사용은 모두 액션 게임의 느낌을 줍니다.
두번째는 물론 조준 보정(aim assist)입니다. 장비에 자체적으로 조준 보정이 붙어서, 조준 보정이 높은 총을 쓰면 내 손이 고자라도 커서를 은근슬쩍 적의 머리통 위에 놔줍니다. 물론 어느정도의 조작이 필요한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다른 FPS들과는 꽤 다른 느낌이에요. 이건 사실 데스티니의 개발사인 번지의 전작이자 전설의 명작으로 이름높은 헤일로에서 온 것이죠. 다들 알고 있는 얘기겠지만 이쪽에 관심없는 분들을 위해 짤막하게 요약해보자면,
어느 시점까지 FPS게임들에게 콘솔은 난공불락의 플랫폼으로 여겨졌습니다. FPS라면 당연히 키마(키보드+마우스)로 플레이하는 것이고, 컨트롤러가 전혀 다른 콘솔에서 FPS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왔었죠. 실제로 조준 보정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상태로 해보면 패드로 조준하는게 굉장히 어려워요. 데스티니에도 조준보정 개입이 제로인 상황이 종종 벌어지는데, 거의 게임하기 어려운 수준이더군요.
여기에 나타난 것이 번지의 헤일로(Halo)입니다. 헤일로는 패드로 조준해야하는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첫번째가 몹들의 움직임. 이전의 FPS들이 보여주었던 몹들과는 달리 헤일로의 몹들은 자연스레 움직이는 듯 하지만 미묘하게 플레이어의 조준을 계산한 듯한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러는가하면 그건 다른데서 찾아보시면 될 것 같고, 두번째가 조준 보정입니다. 조준 보정의 핵심은 물론 '자연스럽게'죠.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기가 조준하고 있다고 믿을만큼 자연스럽게, 인위적인 개입이 느껴지지 않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보정을 해줘야합니다. PvE에서는 그나마 쉬운 편이에요. 몹들의 움직임과 겹쳐지면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준은 되니까요. 근데 PvP에서는 노답이죠. 플레이어 캐릭터의 움직임을 게임이 제어해버리면 안되니까 ...
아무튼 한동안 FPS로는 공략할 수 없는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콘솔 게임기에 헤일로라는 공성병기가 나타났고, 이 병기는 콘솔을 완전히 함락시켜버렸습니다. 요새 출시되는 FPS들은 대부분 콘솔을 베이스로하여 PC판에는 약간의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만 수정&추가해서 내는 것 같더라구요. 한때 난공불락의 플랫폼이던 콘솔이 이제는 FPS의 메인 플랫폼이 된 셈입니다.
사실 저는 이 분야에 과문한 편이라 헤일로나 데스티니의 조준 보정이 다른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느정도 완성도인지 가늠하긴 어려워요. 분명한건 제게 데스티니의 조준 보정은 아주 자연스럽고 - 즉 신경써서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게임이 개입하고 있다는걸 느끼기 어려울만큼 인위적인 부분은 느껴지지 않고 -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FPS와는 꽤 다른, 제가 좋아하는 액션 게임쪽에 살짝 근접한 듯한 플레이 감각을 보여줍니다. 데스티니를 이렇게 열심히 달릴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데스티니는 일종의 mmo 게임입니다. '일종의'라고 쓴건 mmo스러운 부분이 가미되긴 했지만 완전히 mmo라고 하긴 어렵기 때문인데요,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마비노기 영웅전과 유사한 부분이 약간 있습니다. 마을/채널 등등의 구조는요.) 아무튼 이런 류의 게임에서는 커뮤니티가 중요하기 마련이죠. 특히 컨텐츠의 위계를 보면 그러해요. 순차적으로 나열해보자면 솔로잉 가능한 미션과 패트롤들 > 스트라이크 (3인 파티 필요. 난이도 중하) > 나이트폴 (3인 파티 필요. 난이도 중상) > 노멀 레이드 (6인 파티. 난이도 중하) > 하드 레이드 (6인 파티. 난이도 중상)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스트라이크까지는 자동 매치메이킹을 지원합니다. 근데 나이트폴부터는 아니에요. 매치메이킹 없이, 자기가 알아서 사람들 구해서 또는 사람들에게 낑겨서 3인을 만들어 플레이 해야합니다.
당연히 커뮤니티에 관련된 기능들이 필요해요. 낯선 이들이 만나 서로 친해질 수 있는 장치,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치, 내가 플레이하려는 컨텐츠를 함께 할 수 있거나 하려는 이들을 서로 만나도록 도와주는 장치 등등. 놀랍게도 데스티니 내부에는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처음에는 꽤 충격적이었어요. 이 게임엔 심지어 채팅조차 없단 말이죠. 음성 채팅이 가능하긴한데 그건 꽤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만하고, 특히나 모르는 사람들과 채팅 할 수 있는 경로는 전혀 없고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사람들은 이 게임을 활발하게 플레이하고 있어요. 커뮤니티에 관련된 기능을 게임이 거의 제공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법들을 찾아냈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흥미로운 사례들을 볼 수 있죠. 한국에서는 파티찾기가 거의 루리웹 데스티니 게시판으로 통일된 듯 하지만, 북미를 살펴보면 이것도 꽤 다양한 듯 보이구요.
이런 방식은 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아마도 번지에서 원해서 했다기보다는 콘솔이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꿩이 없어서 닭을 택한 것 같긴 하지만, 어떻게든 동작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꽤 있어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파티찾기 기능을 플레이어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죠. 누군가는 루리웹에 글을 올려서 파티를 구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데스티니 단톡방을 쓰기도 하더군요. 제가 가입한 데스티니 단톡방에는 140명이 상주하며 한 시간만 안봐도 대화가 300건 이상 쌓일 정도로 활발하게 대화 중입니다. 저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네이버 밴드를 이용해서 비슷한 모임을 만든 사람도 있다고 들었어요. 저희 클랜원들은 텔레그램에 방을 파서 여기서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고 있어요. 게임 내 클랜 대화창이 있고 이걸 다시 외부와 연동해서 게임 외부에서도 대화를 할 수 있게 (와우처럼) 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게임 외부에 대화 채널을 만든거죠. 게임 내부에는 그런 채널이 없거나 굉장히 불편해서 쓰이지 않고요. 좀 웃기긴한데, 아무튼 사람들은 굉장히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런 다양한 대화채널들이 모두 '자동-즉시-함께 플레이' 기능을 갖췄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거죠. 요새 많은 웹 플랫폼에서 '페이스북 좋아요, 트위터에 올리기' 등등의 기능을 제공하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기능이 있으면 이상적이겠죠. 루리웹에 누가 글을 올려서 파티를 찾는데, 지금은 거기에 올라온 아이디를 PSN에서 친구등록 한 뒤에 데스티니에서 게임에 합류해야하지만 그런 번거로운 절차없이 루리웹에 붙은 버튼만 누르면 바로 같은 파이어팀(파티)에 참여가 된다거나 ... 물론 굉장히 복잡하고 정신없는 절차들 (루리웹을 모바일로 보고 있다가 파티참여를 눌렀는데 PS4가 켜지면서 데스티니가 구동되고 자동으로 파티 가입??)이 수반되겠지만 그냥 철저히 유저 입장에서만 보면, 이런 희망을 가져봄직도 하잖아요?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데스티니가 택한 커뮤니티 아웃소싱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커보이고 다른 유사한 게임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불편해보이긴 해요. 단지 여기서 드러나는 장점이 그간 유사장르에서 보여왔던 것과는 다른 색다른 부분이 많기에, 나중에라도 취할 수 있다면 취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사실 그 외에도 컨텐츠의 배치라거나, 반복플레이성을 올리기 위해 취한 몇 가지 독특한 방법들에 눈이 가긴 했지만 제가 데스티니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아무래도 위에 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액션 게임의 느낌이 가미된 FPS. 그리고 커뮤니티 아웃소싱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들. 사실 전자는 제가 처음으로 느꼈을 뿐, 그 자체로 새로운 일은 아니죠.
조만간 X-COM2가 나올테니 아마도 한동안은 데스티니에서 손을 놓게되지 싶은데, 그리고 3월에 나올 디비전이 만족스럽다면 아예 그쪽으로 갈아탈 가능성도 있지만, 몇달간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플4를 설치하면서 게임을 몇 가지 구입하긴 했는데 지금껏 다른 게임은 시동도 안해보고 오로지 데스티니만 했었으니까요. PvP 매치메이킹 시스템의 멍텅구리스러움만 어떻게 좀 고쳐주면 참 좋을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