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이하 무라카미)는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이자 팝아티스트입니다. 도쿄 예술대학에서 일본화를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할 정도로 애니메이션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을 모두 취급하며 저급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슈퍼플랫이라는 예술 개념을 창안하기도 했습니다.
무라카미 다카시
순수와 상업, 저급과 고급, 서구와 일본문화를 혼합하고 함께 추구했던 자유분방함과 만화를 기반으로 한 대중성은 그를 일본 대표 팝아티스트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앤디 워홀이 캠벨 수프캔을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다면 무라카미는 만화를 통해 예술을 대중의 품에 안겨주었습니다.
내가 제일 잘 나가 - 루이비통, 그리고 슈퍼스타들
무라카미의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은 루이비통과의 협업입니다. 루이비통은 약 100년 전인 1920년대 본격적으로 예술 협업을 진행했을 정도로 예술 마케팅의 역사가 깊습니다. 박서보 화백, 쿠사마 야요이, 제프 쿤스 등 당대의 대표 예술가들과 지속적으로 협업을 해왔는데 그중에서도 무라카미는 2003년~2015년까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진행하면서 브랜드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무라카미 다카시 X 루이비통 협업 제품
무라카미는 루이비통의 첫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천재 디자이너로 불렸던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와도 협업을 했습니다. 버질 아블로의 첫 개인전을 일본에 위치한 무라카미가 소유한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 갤러리에서 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버질 아블로는 2021년 사망)
버질 아블로(왼쪽) / 무라카미 다카시(가운데) / 카니예 웨스트(오른쪽)
2007년에는 미국 슈퍼스타 래퍼인 카니예 웨스트(Kanye Omari West/Ye) 앨범의 표지 디자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카니예 웨스트는 버질 아블로가 무명의 패션디자이너일 때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버질 아블로가 자신의 데뷔 무대였던 2019 봄-여름 맨즈 컬렉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카니예 웨스트에게 안겨 울 정도로 끈끈한 인연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는 무라카미도 있었습니다.
무라카미(가운데) | 카니예 웨스트(왼쪽) | 버질 아블로(오른쪽)
무라카미가 디자인한 카니예 웨스트 앨범 커버
2009년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현대미술가 중 세 번째로 전시를 가지며 더욱 큰 명성을 쌓았고, 가수이자 음악 프로듀서인 퍼렐 윌리엄스와도 협업을 하며 그야말로 '잘 나가는' 예술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합니다. 국내에서는 빅뱅의 탑과 지디가 그의 팬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무라카미의 베르사유 궁전 전시 작품
순식간에 맞은 대위기
무라카미는 어느 날 자신의 회사인 카이카이 키키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다는 영상을 올립니다. 카이카이 키키(우리말로 기기괴괴)는 무라카미가 설립한 회사로 스튜디오이자 작업실입니다. 무라카미의 작품뿐만 아니라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상품을 제작하거나 홍보하는 그야말로 예술 비즈니스의 전반을 아우르는 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버질 아블로가 첫 개인전을 가진 곳도 바로 이 스튜디오에서였습니다.
카이카이 키키의 경제적 상황을 설명하는 무라카미
이런 카이카이 키키가 파산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은 것인데, 이유는 바로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 기획했던 각종 전시회와 프로젝트가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오랜 시간 만들어온 SF 영화 “Jellyfish Eyes Part 2 : Mahashankh”의 제작이 중단되면서 순식간에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가 이제까지 쌓아온 부와 명성이 한꺼번에 사라질 때가 머지않아 보였습니다.
예술이 비즈니스라면? 답은 NFT다.
무라카미는 "아트를 만드는 것은 상업적 활동이고, 상업적 활동이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상업성을 지향합니다. 기업, 인플루언서들과 자주 협업을 해왔을 뿐 아니라, 상업 브랜딩을 위해 미키마우스, 도라에몽, 헬로키티 등 익숙한 디자인을 차용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미키 마우스를 차용해 만든 캐릭터 Mr.DOB
이런 비즈니스 감각은 카이카이 키키가 봉착한 어둠의 위기를 물리쳐줄 등불이 됩니다. 바로 2021년 폭발적으로 성장한 NFT시장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NFT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예술 분야부터였으니 현대미술가로서 화려한 명성을 쌓은 무라카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무라카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이키와 CLONE-X
2021년 11월 나이키는 RTFKT(아티팩트)라는 스니커즈 NFT컬렉션을 위주로 한 스타트업과 협업하여 'CLONE-X'라는 NFT 프로젝트를 론칭합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나이키가 아예 RFTKT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패션 브랜드 나이키의 메타버스 진출을 본격화하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입니다.
나이키의 RTFKT 인수소식을 알리는 트위터
CLONE-X는 NFT프로젝트 중 대표적인 블루칩(우량 NFT)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 NFT의 디자이너가 바로 무라카미였습니다. 2021년 NFT시장 시장세에 발 빠르게 올라타 자신의 입지를 다져 놓은 것입니다.
클론 엑스(CLONE-X/왼쪽)와 무라카미 다카시
회사를 번쩍 들어 올린 무라카미 꽃
무라카미는 2022년 'MURAKAMI FLOWERS'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NFT프로젝트를 런칭했고 이 프로젝트는 무라카미의 명성에 힘입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킵니다. 개당 20만 원대의 총 11,664개의 꽃 모양 그림이 NFT로 판매되면서 런칭(민팅) 당일에만 수 십억 원이 판매됩니다.
MURAKAMI FLOWERS 컬렉션(오픈씨)
NFT는 최초 판매 이후에도 재판매가 될 때마다 계속해서 컬렉션을 만든 작가에게 로열티가 지급되는데 현재까지 거래된 금액을 고려해 단순 계산해 보면 로열티로만 대략 2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의 꽃이 더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꽃은 웃고 있지만
무라카미의 꽃은 NFT를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라카미를 대표하는 이미지였습니다. 2005년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 무라카미는 자신의 꽃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일본인들이 경험한 억압된 감정과 집단적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웃고 있는 모양이지만 웃으면서 볼 수만은 없는 제작 의도입니다. 매우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디자인 뒤에 감춰진 끔찍한 배경은 대조적인 요소들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슈퍼플랫이라는 그의 예술철학과 닮아 있는 듯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콘서트를 여는 방법
그는 무라카미 꽃 컬렉션을 런칭한 이후 구체적인 계획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코로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 데다 NFT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무라카미 컬렉션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꽃 NFT의 로드맵
일반 미술시장에서는 구매자가 작품을 사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NFT는 판매(민팅)되는 순간부터가 시작입니다. NFT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멤버십 혜택을 주고 작가의 전시에 초대하거나 실물 작품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저스틴 비버의 메타버스 콘서트 티저 영상 캡처
무라카미라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전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미러링한 메타버스에서 전시를 열어 홀더(NFT보유자)들을 초대하고 퍼렐 윌리엄스와 메타버스 콘서트를 열어보는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흥미로운 시도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관심을 갖게 하기 마련입니다.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전 세계인들에게 듬뿍 사랑을 받아온 그의 예술이 NFT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