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으로 내려온 철학자
앞서 MURAT PAK(이하 PAK)을 예술 철학자라고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PAK의 조금 다른 모습을 소개할까 해요. 바로 'Censored'인데요, 크립토 예술의 한 매듭을 '철학'이라는 말뚝에 묶어 놓았던 Pak. 이번에는 다른 한 매듭을 '현실'이라는 말뚝에 묶으며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왠지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네요.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어떤 단어를 적더니 글자 가운데에 선을 쭉 긋어 버립니다. 'Censored(검열된)'라는 글자가 굵은 선에 관통되어 있군요. Pak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검열된, Censored
처음 Censored가 알려진 것은 1년 전인 2022년 2월 초였어요. 당시에도 Pak은 유명했는데요, 그의 NFT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Censored의 웹사이트를 방문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자기가 원하는 영문 문구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NFT로 생성되었습니다.
원하는 문구로 NFT를 만들 수 있는 https://censored.art/message(현재 종료) 이미 한 번 NFT로 만들어진(Tokenized) 영문 문구는 동일한 문구로는 그 누구도 다시 만들 수 없게 프로그램되어 모든 문구는 세상에 단 한 개씩만 존재하게 됩니다. 무료였지만, 기부 목적의 프로젝트였기에 기부를 원하는 사람은 원하는 만큼 비용을 내고 자신만의 메시지가 담긴 NFT를 만들었습니다.
Censored는 한 정치적 이슈와 검열 문제를 동시에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정치와 검열이라. 말만 들어도 무거운 주제인데요. 예술가들이 정치와 관련된 작품을 만들거나 참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예술은 현실을 떠나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진리를 다루어야 할 것 같고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색이 느껴지면 뭔가 예술가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일 거예요. 게다가 지극히 구질구질한 현실에 깊숙이 빠져 있는 모습이 예술의 '고귀한' 이미지와 어딘지 안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이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만 보여준다면, 우리 삶과 예술이 진정 어떤 관계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생길 수 있을 거예요. 대체 "내 얘기도 아닌데 뭐가 좋다고 보는 거야?"라면서 말이죠. 또한 예술가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자유가 있고 정치적 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금기시하는 이야기들조차 예술적 표현으로 용인되고 토론이 가능한 분위기라면 건강한 사회의 지표가 될 수 있죠. 그런데 이 Censored는 검열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이슈 중에서도 하필 가장 강대국인 미국의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어요. 뭔가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Censored 프로젝트에 숨겨진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기밀문서 폭로의 대가
Censored는 검열에 반대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애초 단순한 예술 NFT가 아니었습니다. 이 NFT는 줄리언 어산지(Julian Paul Assange/ 이하 어산지)라는 사람을 돕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어요. 어산지는 '위키리크스(WikiLeaks)'라는 세계 각국의 정부나 기업 등의 비윤리적 행위와 관련된 비밀문서를 공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왔는데요.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미 국무부의 공식 외교문서와 비밀문서를 비롯해 2016년 미국 대선에 영향을 준 민주당 전국위원회 이메일 해킹 자료 등 어마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정보들을 공개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어산지는 눈에 가시였을 수밖에 없죠.
위키리크스 홈페이지(https://wikileaks.org)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2010년 미국 기밀문서와 수십만 건의 외교 전문 폭로 때문이었습니다.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과 관련한 기밀자료였는데 그중에는 미군 헬기가 기자를 포함한 이라크 민간인을 사살하던 영상이 포함되어 있었고 공식 보고보다 훨씬 많은 6만 6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사실 또한 알려지게 됩니다.
미군 헬기의 민간인 공격 장면으로 추정되는 비디오(위키리크스 공개) 전쟁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국제형사재판소가 규정한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합니다. 수많은 민간인 희생은 미국의 전쟁 명분에 치명적인 결함을 안겨 주었고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이 비밀문서는 누가 유출한 것일까요? 바로 당시 미군 정보병이었던 첼시 매닝이었습니다. 비밀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군인이 직접 국가가 저지른 범죄를 고발하다니. 첼시 매닝은 평생 감옥에서 살 수 있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불이익과 비난이 따를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쟁 범죄를 눈 감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녀는 외부 세계에 알리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말하자면 내부 고발자가 된 셈이지요. 첼시 매닝은 이 사건으로 3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추후 오바마 행정부 때 7년형으로 감형됩니다.
기밀자료를 유출한 첼시 매닝(위키리크스) 범죄를 감추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위키리크스 창립자인 어산지에게도 향했습니다. 호주 출신인 어산지는 미국의 기소를 피해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다가 결국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현재는 영국의 벨마시 감옥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그를 자국으로 송환해 법정에 세우려고 합니다. 어산지가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스파이방지법(Espionage Act)을 포함해 미국으로부터 현재까지 기소된 항목을 고려할 때 최대 175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Censored는 어산지가 미국으로 인도되지 않도록 법적 싸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 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아닌 범죄를 알린 사람을 처벌하고자 하는 미국의 모습. 이는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의 ‘종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및 청원의 권리’에 명기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어산지의 운명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요?
줄리언 어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