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보내는 연서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음에 의심만 가득한 세상이다. 엄마들에게 말이다.
그런데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 내가 선택한 남자도 나에게 냉정하고 내 돈 쓰는 커피숍에서도 백화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나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따뜻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아이를 최대한 잘 키워내야 한다는 미션이 생겨 버렸다. 내가 원한 미션이 아니었다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이미 낳은 아이이고 나는 아이를 낳는 그 순간 사회적으로 아줌마 혹은 엄마일 뿐이다.
아이를 잘 키우는 거 외에 ‘엄마’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말인즉, 나는 ‘아이 잘 키우기’ 미션을 거부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커리어우먼이든 전업주부이든 프리랜서든 장애가 있든 없든 아이를 낳은 여자는 그냥 엄마이고 아이를 잘 키워내지 못하면 인생 허투로 산 게 되어버린다.
"일 잘하면 뭐해? 애가 그 모양인데..."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애 단속도 못해?"
"일도 하고 애도 키우고 난리치다 저럴 줄 알았지"
"자기 몸도 못가누면서 애는 왜 낳아 키운대?"
"사지 멀쩡한 여자가 애를 왜 저 모양으로 방치한대니?"
아이들에게는 사고칠 권리가 있다. 사고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다치면서 인생과 이 사회의 모든 것들을 경험으로 배우고 깨달을 권리 말이다. 그러나 사회는 ‘엄마’라는 만능방어막으로 그 권리를 아이로부터 빼앗는다. 1차적으로는 엄마가 아이를 과보호하면서 아이의 실수하며 배울 권리를 빼앗지만 그렇게 엄마들을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 시선, 이중잣대들이 뒷짐지고 나는 모르쉐~ 다 저 여자가 지 애에 미쳐서 저렇게 된거네~ 하는 상황들에 나 같은 엄마들이 억울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아...이 끝도 없는 이야기는 그래 이쯤에서 집어치우자. 나는 영화 <미씽>과 <비밀은 없다>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다시 돌아가서 그래...백번 양보하자. 엄마들에 대한 뭐 따뜻한 시선까지 바라지 않았다 치자. 그랬대도 뭐 이렇게까지 냉정해야 하나 원망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 때 나도 저 남자의 사랑을 받았을 거고 한때 나도 사회의 일원으로 제법 활약했을테다. 고단했어도 인정과 신뢰로 소통하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가부장 가족 제도 안으로 들어와 엄마 자리를 차지해보니 그건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몽상이었나 싶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자기 자식밖에 모르거나 그것 마저 잘 몰라 믿을 수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딱서니에 돈만 써대는 이 사회의 벌레이며 혐오스런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맘충이나 커피충이고 김치녀 된장녀이며 무개념녀...이 모든 표현들이 나를 표현하는 데 적절하다. 무척이나 적절하다. 이 표현들을 피할 도리가 도저히 없다.
영화 <미씽>, 나는 지선일까 한매일까? 어쩜 그 둘 모두?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으니 뭐 어쨌든 살아야 한다. 아이가 있고 남편은 바람이 났고 돈을 벌어야 하며 육아에 무지한 초보엄마이며 도움 받을 곳 하나 없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 그게 영화 <미씽>을 보면서 이해해야 할 지선의 전반적인 감정이다.
영화 <미씽>에는 두 여자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그렸다. 하나는 아까 언급한,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지선의 ‘절박함’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한매를 통해 ‘다정함’을 느끼도록 했다. 극 중 한매를 통해 다정함을 느끼다니 이게 뭔 말인가 싶겠다. 그녀는 소름끼치는 복수극을 준비하고 미련맞을 정도로 아이에게 집착하는 인물 아니던가! 반면 한매는 자장가 한 소절만으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진정시키는 실로 놀라운 모성적 능력을 가진 여자인데 그게 바로 다정함의 능력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한매, 그녀는 신비로울 정도로 다정한 여자라는 게 내가 영화 <미씽>을 보면서 진정 소름 끼친 부분이었다. 생존을 100% 의지해야 하는 순수한 아가들만 느낄 수 있는 무조건적인 따뜻함. 그게 그녀의 다정함이 가진 능력의 정체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신체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되어 유린당하기 바쁜 여자. 몸이라도 내놓지 않으면 내 몸을, 내 아이를 지켜낼 수 없는 여자가 유일하게 가진 능력이 바로 ‘다정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정함은 어떻게 다뤄졌는가? 이용하고 유린하고 무시하고 모른체했던 수 많은 주변인들의 폭력에 다정함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 아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다정함은 인상적이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능력이었다. 심지어 그녀 자신에게는 불행한 능력이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그 능력 때문에 그녀는 육아에 외려 집착했으리라 느껴졌다면 비약이겠지만 그래도 비약하고 싶다. 한매는 아무리 자신을 무시하고 겁탈해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모든 극악한 상황들을 견뎌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해지든 상관없이 지키고픈 아이를 결국은 지켜내지 못한 다정한 그녀는 분노한다. 다정함이 분노와 집착 그리고 광기로 연결된다. 그녀의 차디찬 분노와 복수로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데...결국 그녀는 인천? 앞바다 저 깊은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내 마음대로 비약하자면, 한매라는 여성을 통해 상징된 여성의 다정함은 그렇게 사라졌다. 절박했던 지선은 다정했으나 분노하고 복수로 자신에게 다가왔던 한매를 원망하지 않았고 끝까지 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잡을 수 없었다. 이제 영원히 절박할 여자만이 홀로 남아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 아 이건 비극이고 너무나 현실적인 결말이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떠올릴 때 다정함 보다는 절박함을 느끼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금 이 시대 엄마들은 다정함보다 절박함으로 생을 유지한다. 다정해봤자 돌아오는 이득이 없는 일상이다. 절박함이라도 이해받으면 다행이지 않은가.
사라지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 그게 무엇이든 사라진 존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어쨌던 그건 비밀이 아니다. 여자들에게서 다정함을 찾기 어려워진다는 거 말이다. 난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영화 <비밀은 없다>를 선택했다. 모성과 가족에 대한 비밀, 그런 건 없다는 이야기리라, 막연하게 짐작했으나...이 영화는 모성은 동력일 뿐 핵심 메시지는 ‘복수’ 혹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가족 내 관계에 대한 함수들,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비밀들,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들만 모르는 비밀들이 결국 비밀의 당사자들을 어떻게 파탄으로 이끄는지 그리고 그 파탄의 과정이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도록 세상에 공개되는 게 이 영화이 결말이다.
영화 <비밀은 없다>를 보면서 놀란 건 지금 한국의 십대소녀들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 십대소녀들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작품화 하려고 애썼던지라 그 부분이 제일 감탄스러웠다. 지금의 십대소녀들은 어른들의 비밀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비밀의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고 그 비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다가 다치곤 한다. 십대소녀들에게 비밀을 알려주지 않으려는 사람들, 비밀의 당사자들은 사실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그녀들을 대하지만...어림없는 소리다. 누가 누구를 보호한단 말인가.
이미 더러워진 아빠는 딸이 자신의 불륜을 아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잘 굴러간다고 믿고 싶었던 엄마는 뒤늦게야 진실을 알게 된다.
불온한 것에 이끌린 선생님은 아이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머물 뿐이다.
한번도 누구도 이 십대소녀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음은 너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국 또 엄마는 엄마인 죄로 진실과 비밀에 차근차근 다가간다.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아쉽다. 왜 아쉬운지는 모르겠다.
감정적으로 동요가 되질 않았다. 영화 <미씽>은 감정적으로 너무 동요가 돼서 괴로웠다면 <비밀은 없다>는 너무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게 만들어서 섭섭했다. 아, 나는 말도 안되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감정쟁이라 그런가보다. <비밀은 없다>를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기보다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필요한 도덕교과서를 본 느낌이었고 적대감이나 비난 없이 조곤조곤 고쳐야 할 점들을 지적받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나에게 결함이 많다는 것도 비밀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