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박선영 Jun 28. 2019

기억 속의 행복, 현실의 우울

...따위 없는 행복한 여행, [반짝반짝 빛나는 내 별자리를 찾아서]

근간에 다닌 여행 중 가장 행복한 여행이었다. 워크숍을 진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주변 풍경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숨막히게 하는 부담감은 아니었다. 적당히 긴장감을 가지고 바라본 창 밖 풍경은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국의 바다는 제주고, 산은 강원도랬는데...나는 강원도 영월로 향하고 있었고 6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은 절기상으로는 하지였다. 낮이 가장 긴 6월 마지막 주말 강원도의 산들은 초록 기운을 짱짱하고 예쁘게 내뿜고 있었다. 7~8월의 뜨겁고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한 초록이 아닌, 아직은 싱그러움을 간직한 채 절정을 향해 치달을 준비가 되어 있는 초록...그 위 하늘은 미세먼지 없이 파랬고 포근한 하얀 구름들까지 적당히 있어서 멍~ 하니 하늘보기 딱 좋은 그런 날이었다.


강원도 영월은 ktx가 가지않고 석항은 10인 이상 신청해야 하차가 가능하다.


오랜만에 쾌속열차 KTX가 아닌 무궁화호를 탄 것도 기분 좋았다. 덜컹거림과 낡았지만 왠지 친근해 아늑한 의자도 정감있었다. 서울에서 자가용으로도 2시간 30분 거리를 기차를 타고 3시간 이상 가야 하는 비효율적인 동선도 싫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는 마음이 급해도 대책없이 쉬어야 하니, 수다 떨다 잠들었다 다시 일어나 창 밖을 보며 멍하니 바라보니 좋았다.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가.



석항에 저런 뜻이 있다. 지역 벽화에 저런 이야기와 정보가 같이 있는 건 좋아서 한 컷!


강원도 영월은 아직  KTX가 지나지 않는 곳 중 하나이고 석항역은 그 무궁화호가 서지 않는 곳이다. 10인 이상 코레일에 문의해서 신청하면 하차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남들이 잘 내리지 않는 곳 석항역에 숙소가 있었다. 석항역에 하차신청을 해놓아서  영월을 지나자 기차 승무원이 우리 일행을 찾으러 왔다. 우리가 기차에서 내릴 때 직접 에스코트해주기 위해서였다. 기차 승무원은 십여명의 여자 무리가 누구도 잘 내리지 않는 석항에 내리는 것이 신기한지...아니면 석항에 여자들만을 위한 어떤 행사가 있는데 자신들만 모르는 가 싶은 호기심인지 이것저것 물어왔다.

 '여자들끼리 여행을 다니는 그룹인데 이번에 강원도 석항에 가기로 했다. 거기에 기차를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우리의 여행에서 그들에게 알려줄 만한 정보는 딱 그 두가지였는데 여자들끼리만 여행다니는 그룹이 있다는 정보가 여행의 과정에서 만난 지역의 남자들에게 제법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다. 기차 승무원은 물론, 별마로 천문대로 이동할 때 차를 운전해준 운전사도 언제부터 이런 모임이 있는지 얼마나 자주 여행을 다니는지 몇 명이나 있는지 무척 궁금해 했다.

우리는 물론 성의없이 대답했다. 그들의 얕은 호기심은 매우 익숙하고 성가신 것이지만 여행하는 그 순간은 익숙하지 않은, 어렵게 얻어낸 귀중한 순간들이어서 그들에게까지 성의를 내보일 여유가 없었다. 그런 질문들이 싫어 죽겠는것도 아니고 화가 나서도 아니고 그 질문을 하는 그들을 혐오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여유가 없었다.

내 인생에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다 각자 모두 어렵사리 만들어낸 시간에 잘 모르는 이들이어도 좋으니 함께 떠나보자고 모였으니...

이번 여행 멤버들과 석항을 떠나는 날의 하늘.

석항에는 기차를 개조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기차 5칸 정도를 모아 한 칸은 다인실, 두어 칸은 4인실, 2인실로 꾸려 놓았고 한 층 더 얹어 2층에는 카페를 만들어 놓아서 운치있었다.

석항 트레인스테이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자마자(정확하게는 가방을 숙소에 집어던져놓고 ㅋㅋㅋ) 영월 서부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의 먹거리 버킷리스트 올챙이국수를 드디어!!!)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는 영월의 명소에 다녀왔다. 처음 만난 어색함이라는 난관을 뚫고 같이 먹고 사진 찍고 돌아다니보니 금방  친해진 시간이었다.


강원도의 대표음식 중 하나인 옥수수, 그 전분으로 만든 국수인데 모양이 올챙이 같이 생겨서 올챙이국수!
뗏목체험도 있는데 땡볕에 느린 뗏목을 타고 싶지 않았다. 저 지형은 정말 지금봐도 신기방기^^

배부르고 고단해질 즈음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10분은 쉬었던가?!)  [반짝반짝 빛나는 내 별자리를 찾아서]워크샵이 진행되었다.

부담스럽지는 않아도 긴장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워크샵이 시작되니 긴장감이 더했다. 남들 앞에서 나서서 말하는 걸 잘 못하고 싫어하는 탓이었다. (이 글을 읽는 내 지인들은 정말? 하면서 놀랄 것이다.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는 쾌속열차를 탄 듯 한번도 쉬지않고 수다를 떨어대는 모습만 보여줬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워크샵이 성공적이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워크샵에서 제대로 된 발표에 자신이 없던 나는 참여자들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싶었다. 분노가 여성들이 억압해야 할 무엇이 아닌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들 그리고 각 별자리마다 다른 분노에 대해 표로 정리해 나눠주고 이야기했다.


워크샵 자료로 만들어진 별자리마다 다른 분노의 이해. 마구 퍼가도 됩니다, 출처만 밝혀주세요.


각 별자리마다 분노를 이해하는 정도도 다르고 억압하는 방식조차 다르다는 점을 말했다.

분노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강조했다.

각 별자리마다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장점이 달라서 분노를 극복하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내 별자리 뿐 아니라 다른 별자리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데...결과는 역시 잘 모르겠다. ^^;

(나 혼자 실컷 떠든 느낌도 없지 않아서리...)


워크샵이 끝나고 우리는 진짜 별을 보러 갔다. 별마로 천문대는 산 꼭대기에 정말 바로 하늘 밑에 있다. 그말인즉 거기를 오르려면 완전 오르막길을 꼬부랑꼬부랑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또 별을 보기 위해 그 높은 꼬부랑꼬부랑 오르막길을 갔다는 것은 깜깜한 한 밤중이었다는 말이다...결론적으로 사실 올라갈 때는 좀 무서웠다.

온통 깜깜한 밤이 너무 오랜만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고 꼬부랑꼬부랑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내려오는 차들과 좁은 길에서 대치하듯 마주치면 덜컥 겁부터 났다. 그렇게 겁이 날 땐 하늘을 봤다. 고개를 뒤로 젖힐 필요도 없이 사방이 깜깜하고 반짝이는 별들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다행인건지, 더 무서운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지만 태어나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별을 고개만 돌려도 볼 수 있는 밤은 정말 처음이었던 것 같다.

사진으로 찍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그 수 많은 지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지만 절대 그들과 공유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처음 만난 낯설고 믿음직한 여자들 뿐이었다. 그 또한 묘하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목성의 줄무늬도 보고 토성의 고리도 함께 본 여자들. 그 깜깜한 밤에 같이 별본 사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효율성 있게 산답시고 하루 24시간을 정말 시간시간마다 쪼개어 할 일을 만들어 목록으로 체크해가면서 알차게 써왔던 그 몇년의 시간들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졌다. 뭐 할라고...뭘 이루겠다고...뭘 이룰 수 있다고...대체 누굴 위해...쌓인 건 피로요, 되돌아온 건 더 많은 일 뿐인데...그러나 그리 바쁘게 살아서 얻은  한가지 교훈은 있다.


찰나의 휴식이 절대 소중하고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 순간에는 철저히 쉬어줘야 한다는 것! 어차피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면, 또 이번 워크샵 주제처럼 화를 내기로 했다면 피하지 말고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몰두가 아닌 집중이 필요하다.

내 자신에게 화가 날 때 특히...그 순간의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이성을 어렵사리 찾아내고 다른 이가 아닌 나에게로 에너지를 집중하고 그렇게 나와 타인을 구별할 줄 알아갈 때 진정한 '배려'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알긴 알아도 어쩌면 아직 온전히 실천하기 어렵다는 게 함정이지만...분노안에는 나와 타인이 공존할 수 있는 배려의 기술이 숨어 있음을 적어도 나는 이번 워크샵을 통해 확인했다.

'분노'를 억압하지 않고 제대로 잘 표현할 때 얻을 수 있는 지혜와 가치들이 있음을...이야기하고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나는 그랬다.


나는 낯설고 따뜻한 여자들과 함께 이 여행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보통 행복은 추억속에만 머물고 현실은 늘 우울하기 마련인데...

이 여행이 준 행복감은 좀 달랐다. 좀 더 달콤하달까?

그 달콤하고 행복한 기억을 가질 수 있어서 추억할 수 있는 지금 나는 전혀 우울하지 않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시간을 쪼개어 일하면서 챙기는 것 보다는 놓치고 실수하는 게  많은 일상일지라도...

떠날 수 있는 기회와 계기가 열려있는 생을 살고 있으므로...



p.s 이번 여행의 백미는 숙소인 석항트레인스테이! #석항트레인스테이

식사와 음료와 숙박이 해결되는 기차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이지?






작가의 이전글 분노를 허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