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 May 01. 2017

전혀 ‘특별’ 하지 않은 ‘특별시민’의 여성 캐릭터들

#6 특별시민

영화 ‘특별시민’은 오랜만에 내가 기대를 가지고 있던 한국 영화였다. 요즘처럼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좀처럼 보기 힘든 때에, 라미란, 문소리, 심은경, 류혜영이라는 쟁쟁한 그리고 탄력을 받고 있는 배우들이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대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전작을 본 적이 없어서 영화의 스타일이나 분위기에 대해서 감을 잡기가 어려웠지만 그저 여성 캐릭터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가 궁금해서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여성 캐릭터 자체에 목마르게 되었을까....)


기억에 남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


하지만 나의 영화에 대한 이런 기대는, 영화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했다.

먼저 라미란이 연기하는 ‘양진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3선에 도전하는 서울 시장 ‘변종구’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지만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서울 시장 출마 기자회견에서 떨어져 나간 블라우스 단추로 인해 ‘양진주 가슴’으로 실시간 검색 1위에 오르거나 재난 사고에 가서 눈물을 흘리거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소리만 지르는 것뿐이다. 사실 양진주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도 않는다. 연기를 잘했다 못했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장면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심은경이 연기한 ‘박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양진주’는 분량이 너무 적기도 하고 스토리상(변종구와 심혁수에게 집중되는 이야기이다 보니) 그녀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치더라도, ‘박경’은 나름 비중이 있는 역할이다. 더러운 피 냄새가 난다는 정치인인 변종구와 심혁수의 사이에 등장한 새로운 캐릭터로 그들을 가장 많이 흔들 수 있고 영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경’ 또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다. 영화 도입부 장면인 청춘콘서트에서 열심히 손 들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장면만이 그나마 ‘박경’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를 알리는 장면이었달까.


영화 속 ‘박경’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간다. 당돌했던 모습은, 선거 캠프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수동적’으로 변해간다. 물론 종종 튀는 행동을 하긴 했다. 홍보본부장의 성매매 사건을, 자신의 선배이자 기자인 ‘정제이’에게 팔아넘기는 장면이라던가. 하지만 그것도 초반부의 일들이다. ‘박경’은 확실히 중후반부로 갈수록 그 힘과 입지가 희미해진다. 감독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젊음의 패기 따위 결국 그 한계가 있다, 조직에서는 펼치기 어렵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류혜영이 연기한 ‘임민선’은, 뭐라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게 분량이 너무 적고.... 그래서 정말 너무 안타까운 캐릭터이다. 양진주 선거 캠프에서 가장 똑똑하고 선거 흐름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음에도 그냥 말 한마디만 하고 끝이다. 물론 당돌한 카리스마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사라진다. 그나마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키는 캐릭터로 나온다는 점이 다행이긴 하지만.


‘임민선’과 ‘양진주’의 관계 또한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양진주’는 ‘임민선’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로 나올 뿐이고 ‘임민선’은 그걸 답답해하는 게 전부다. 잠시의 불꽃이라도 파박 튀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여성 캐릭터들은 재미가 없다.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건 문소리가 연기하는 ‘정제이’다. ‘정제이’의 활약을, 개인적으로는 문소리의 승리로 보는데 그 이유는 ‘정제이’를 경계에 있는 인물로 굉장히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선도 악도 아닌,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그 미묘한 캐릭터를 살린 건 확실히 문소리의 연기가 컸다고 본다. 자칫 연기가 이상했으면 어느 쪽으로 확 치우치게 보이거나 정제이가 원하는 것, 그 욕망이 관객들 눈에 훤히 다 보였을 텐데 문소리는 그 경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정제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무엇을 얻었을까? 앞으로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생기는 유일한 여성 캐릭터였다.


확연히 차이가 난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


이 영화는 명백히 최민식이 연기하는 ‘변종구’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그리고 ‘변종구’와 곽도원이 연기하는 ‘심혁수’의 관계에 집중하는 영화다. 정치판의 이야기, 부패, 비리, 검은돈 등을 그리니까 그래... 현실을 반영한 차원에서 남성들이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고 치더라도 여성 캐릭터들을 이렇게 들러리로 밖에 못 쓰는 건가. 들러리도 들러리 나름인데 이건 좀 심한 들러리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기억에 남을 장면조차 없고 너무나도 뻔한 모습만 보여준다.


‘변종구’는 자신의 음주 뺑소니 사고를 딸에게 뒤집어 씌울 만큼 매정하지만 정치, 권력 욕망이 뚜렷한 인물로 나오는 반면 ‘양진주’는 대마초 흡연 및 소지 혐의를 받는 아들을 감싸주느라 자신의 선거를 망칠 뻔한다. 부성애 없음과 모성애 있음.... 왜 남녀의 차이는 이렇게만 그려지는 걸까?


그리고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제이는 좀 다르긴 하다) 왜 늘 그런 모습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건지, 영화 속에서 바른 소리를 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볼 때마다,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무언가가 느껴져서 숨이 턱턱 막혔다.


마지막을 장식할 키를 쥐고 있었던 여성 캐릭터, 하지만....


영화는 시원하지 않은 결말을 보여준다. 이 시원하지 않음은 분명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영화가, 모든 이야기가 통쾌한 무언가를 하고 끝을 낼 수는 없는 것이고,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어느 정도까지는 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찝찝함은 왜인지 가시지가 않는데, 그건 그 마무리가 여성 캐릭터에 의해 행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많은 관객들이 ‘역시 여자라서 그랬을 거야. 엔딩이 저렇게 된 건 키를 쥐고 있었던 것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도전적이지 않은 여성이기 때문에 저렇게 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게 너무 염려되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박경’이 이후에 무언가를 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분명 빅픽쳐를 그리며 무언가를 준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심지어 이 빅픽쳐 속에는 ‘임민선’의 활약도 들어가 있다!!) 이건 나의 상상일 뿐, 많은 관객들이 본 결론은 그동안의 남성 캐릭터들이 시원하게 무언가를 터트리거나 해결하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여성 캐릭터의 선택이지 않을까?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색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단순히 저지르기보다 차근차근 쌓아 올려 치밀하게 만들기 위한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여성다운 선택일지 모른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어쩌라고?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여성’ 다운 건 이제 그만 좀 보고 싶어서요. 강력한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 ‘미스 슬로운’을 보고 난 뒤라서 더욱더 이렇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참 아쉽다.


조금 더, 경계를 허무는 여성 캐릭터들을 보고 싶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욕망이라는 그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