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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Feb 01. 2018

치열하고 지독한 존재 증명을 하고자 했던 여성들

#7 조용한 열정 & 스톡홀름의 마지막 연인 

영화 조용한 열정(A quite passion, 2016)의 주인공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실존 인물로 1830년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고, 중년 즈음부터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평생 시를 쓴 시인이다. 영화 스톡홀름의 마지막 연인(A serious game, 2016)은 1912년 발간된 스웨덴 소설 ‘시리어스 게임’(A serious game, 얄마르 쇠데르베리 저)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인 리디아 스틸레는 아비드라는 남성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다른 남성과 결혼한 후에도 그와의 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사랑을 위해 돌진하는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았고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여성이라는 위치와 지위가 많은 것을 제한받는 사회를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에밀리 디킨슨이 살았던 19세기의 미국은 빠른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영토 확장 등으로 전쟁이 지속되어 있었고 보수적인 기독교의 영향 아래 여성의 위치와 지위는 확연히 남성에 비해 낮았다. 에밀리와 그녀의 여동생 비니가 다닌 초등학교도 그들이 입학하기 2년 전부터 여자 아이들의 입학을 허용하기 시작한 정도였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보통 사람들도 참정권이 있어야지’, ‘여자가 보통 사람이야?’와 같은 대사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리디아 스틸레가 살았던 20세기 스웨덴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시대였다. 일은 할 수 있었지만, 영화 속에서 아비드가 일하는 신문사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은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일 정도나 할 수 있었다.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적다는 건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제권도 대부분 남성에게 있었다. 여성이 독립적인 삶을 살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두 여성은, ‘뜨거운 욕망’과 ‘지독한 존재 증명’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제재받는 것들이 너무 많은 사회를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아니 어쩌면 그걸 넘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표출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려고 했다. 


여성의 욕망을 가로막은 벽

어린 에밀리 디킨슨은 영화 초반에 학교 선생님의 ‘하느님께 와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에 ‘전 아직 깨우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회개를 하나요?’라고 반문을 한다. 그는 그냥 하라거나 따르라는 것에 순응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진심으로 그것을 찾으려고 했다. 


결국 학교를 뛰쳐나온 후 집으로 돌아간 에밀리는 아버지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을 요청하고 허락을 받는다. 모두가 잠든 밤부터 새벽까지의 시간을 말이다. 영화 속에서 에밀리가 결혼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남편이 시를 쓰는 그런 행동을 허락하겠느냐?’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그 시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과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에밀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밀리는 여성의 능력이나 재능이 그리고 무언가를 향한 욕망이 용인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시를 계속 쓴다. 냉정하게 말해서, 시를 쓴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는 당시 지역 신문사 중 하나였던 스프링필드 리퍼블릭(Springfield Republican)에 실리긴 하지만 작가의 이름은 익명으로 나갔고 편집장인 사무엘 볼즈(Samuel Bowles)에 의해 멋대로 편집되기 일쑤였다. 특히 그녀의 시가 가진 특징이기도 한 쉼표, 마침표 등이 원래 의도와 달리 변경되거나 제거되었다. 


리디아 스틸레도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리디아는 큰 명성을 얻지 못한 화가의 딸로 자신도 그림을 그리지만 그걸로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취재하러 온 언론사의 교정자인 아비드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얼마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고 가사 도우미 일을 구한다는 광고를 내기 위해 신문사를 찾았다가 아비드와 재회하게 되지만 그로부터 그는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고 아직 결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리디아는 나이는 많지만 재력가인 남성과 약혼한다. 그리고 리디아와 아비드는 각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뒤에 우연히 만나 이루지 못했던 사랑의 열망을 다시 불태운다. 


세기의 사랑, 이루지 못한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 등으로 홍보된 이 영화의 이야기는 흔하디 흔한 불륜 치정 멜로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리디아의 모습에 끌렸다. 리디아는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제한적이었던 이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찾으려고 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혼자 살아보려고 했고,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남성을 목 빠지게 기다린 게 아니라 그 사람보다 더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성과 결혼했다. 이런 리디아가 영악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리디아가 정말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벽에 부딪히면서도 ‘나’를 드러내다

에밀리 디킨슨도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너의 영혼은 하느님의 것이다’라는 말에 ‘나의 영혼은 나의 것이에요’이라고 말하는 그는 목사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는 말도 거절한다. 그는 어떤 맹목적인 믿음을 따랐던 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고자 했다. 종교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전부를 장악하게 두진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또 대부분의 여성들이 하지 않았던, 시를 쓰는 에밀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보였다. 스스로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을 가두는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적극적 행동이었다. 


리디아 또한 솔직하고 열정적인 감정 표현을 하면서 아비드와의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재회한 아비드를 먼저 유혹하는 것도 리디아였고 사랑을 확인한 후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한 것도 리디아였다. 극 중 내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비드와 달리 리디아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돌진한다. 


어떤 면에서는 리디아가 사랑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저렇게 그 사랑을 하고자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리디아의 모습은 그 사랑에 잡아 먹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랑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있기 때문에 이 사랑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에밀리 디킨슨은, 여성 작가들이 쓰는 글은 생각과 감정이 많고 그들은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가난하고 혼자 불행한 삶을 보낸다는 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시를 썼다. 리디아 스틸레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장 원하는 지독한 사랑을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가 봐서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100% 옳았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에밀리와 리디아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자 했다. 자기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여성들의 존재 증명은 계속된다


‘조용한 열정’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밀리 디킨슨이 읽는 시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 편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회신한 적이 없는 세상을 향해 쓰는 것이다.”’(This is my letter to the world that never wrote to me)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편지 형식으로 많이 쓰인 특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는 그가 죽고 난 후 평가되기 시작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나의 외침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세상, 왜 이렇게 계속 외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지칠 때도 많다. 방법이 잘못된 건지 고민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야 하는 건, 누군가 에밀리의 말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했고 이렇게 지금의 나에게 그의 말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응답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응답을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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