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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Oct 14. 2018

왕자는 필요 없어, 재생산 논의가 필요할 뿐

미국 드라마 <더 볼드 타입>(The bold type) 중에서 

섹스가 끝난 뒤 “앗, 콘돔 찢어졌어.” 말을 한 남성과 여성 모두 잠시 얼어붙는다. 이다음 어떤 장면이 나올까? 허둥대는 남자와 우는 여자? 혹은 그거 별거 아니라며 무슨 일 있으면 책임지겠다고 허세 부리는 남자와 그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여자? 아니면 다음 날부터 연락이 안 되는 남자와 절망하는 여자? 그런 장면이 아니라, ‘사후피임약’(Morning After Pill)을 심지어 ‘배달 주문’하고 집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나온다고 하면 SF 장르 같을까? 하지만 SF가 아니라 2017년부터 미국 Freeform 채널에서 방송 중인 TV 드라마 ‘<더 볼드 타입>’(The bold type)에서 등장한 장면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여성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는 제인(Jane), 서튼(Sutton), 캣(Kat)의 우정과 연애뿐만 아니라 일과 성장에 대해 다루는 이 드라마는 밀레니얼(Millenniels, *미국 등 서구권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8~9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일컫는다) 여성들을 조명하며 이들이 마주하는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도 다룬다.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특성상 반짝이고 화려한 패션이나 메이크업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드라마다. 

 

시즌2의 ‘플랜 B’(Plan B) 에피소드에서 제인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 벤과의 섹스 이후 사후피임약을 먹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 에피소드엔 몇 가지 눈길이 가는 장면들이 있다. 먼저 제인과 벤이 약사나 의사를 찾아가지 않고도 구매하는 건 물론 배달을 통해 약을 받는데 배달부는 전달 사항이라며 “어지러움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며 약을 건넨다. 미국에선 15세 이상이면 사후피임약을 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지만(*물론 여전히 많은 청소년들이 사후피임약을 구매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배달 서비스를 통해 약을 받는 장면은 조금 신선했다. 거기다 친절히 부작용까지 읊어주는 배달부라니.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제인은 메스꺼움과 어지러움 등을 호소하는데 이 장면에서도 서튼이 사후피임약 먹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도 그랬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물론 제인의 전 썸남인 라이언과 마주쳤을 때 그는 제인에게 “너 얼굴 안 좋아 보인다. 배탈? 임신? 사후피임약?”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넨다. 무례하거나 비꼬는 말투가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를 언급하듯이 말이다. 


한국 TV 드라마에서 피임이나 사후피임약 같은 소재를 다루는 일이 없어 생소하긴 하지만 미국 드라마에선 가끔 있긴 했었다. 뉴욕에 사는 싱글 여성을 동경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봤을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서도 캐리가 ‘다이아프램’(*피임의 방법으로 고무로 만들어진 기구를 질 안에 넣어 자궁구를 차단해 정자가 자궁 내로 진입하는 걸 막는 방식)을 쓰다 그게 질 안에 걸려서 사만다를 불러 꺼내려고 하는 에피소드가 나오기도 했고 피임이 언급되거나 사후피임약을 몰래 사러 가는 등의 장면 등은 드라마나 코미디에서도 종종 나온다. 


한편으론 잘못된 연출로 비판받는 일들도 있다. ‘사후피임약’을 ‘인공임신중지’라고 생각하고, 이미 임신인 걸 알게 된 여성이 ‘인공임신중지’를 위해 ‘사후피임약’을 사서 먹는 장면들 말이다. ‘사후피임약’(Morning After Pill)은 섹스 후 72시간 이내 먹어야 하며 이 약은 난소가 일시적으로 난자를 배출하지 않도록 해서 임신을 방지하는 것임으로 ‘인공임신중지’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잘못된 정보 전달을 하는 건, 여전히 TV 업계에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남성 제작자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기도 했다. 


<더 볼드 타입>은 ‘사후피임약’ 이야기에서 한발 짝 더 나간다. 사실 극 중에서 제인은 BRCA1 유전자(*유전성 유방암을 일으키는 원인 유전자) 보유자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셨고, 그런 이유로 시즌1에서 검사를 통해 자신이 BRCA1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제인은 사후피임약의 부작용이 조금 더 걱정되는 상황이었던 거다. 결국 제인은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가고 의사는 궁극적으로 암 예방을 위해선 난소 절제술(oophorectomy)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전 아직 25살밖에 안 되었는데요?”라고 묻는 제인에게 의사는 난소를 냉동 보관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며 “이제 당신의 재생산 계획들(Reproductive plans)에 대해 생각해 볼 때”라고 말한다. 

 

누군가 나에게 나의 재생산 계획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던가? 


‘이성애 중심 가족주의’에 기반한 결혼, 임신, 출산 계획이 아니라 ‘나의 재생산 계획’을 말이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엔 재생산이라는 말도 생소했었는데 그런 말이 드라마에 나오다니. 순간 머리 속에서 ‘딩-’ 종이 울렸다. 내가 나의 몸을 바라보고 탐구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전까지 사실 어떤 재생산의 방법이나 권리가 있는지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결혼, 임신, 출산’에 의문을 가지는 것에 대해 별난 취급을 할 뿐.


현실의 여성들은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 굉장히 한정적인 정보만을 제공받으며 자신에게 정말 어떠한 선택이 있는지 들여다보지 못한다. 인공임신중지의 선택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피임에 대한 선택지, 출산에 대한 것도 그렇다. 며느리의 건강 상의 이유로 자연분만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손주의 아이큐를 이유로’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아버지가, 드라마도 아닌 리얼리티 방송에 나온 게 바로 얼마 전 일이다. BRCA 유전자 유무를 검사하고 유방암이나 난소암이 발병할 위험 요소를 체크하며 그 예방을 위해 난소절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 이런 일들이 내 몸에 미치는 영향과 정말 내가 원하는 재생산을 생각하는 ‘사치’ 따윈 아직 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인은 남자친구인 벤에게 BRCA 유전자 보유 사실과 재생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그에게도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단 난자를 냉동 보관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후 에피소드에서 난자 냉동 보관이 자신의 회사 보험으로 처리되지 않는 걸 알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 계획은 중지된다. 그 과정에서 의사인 벤은 자신의 직장이 파트너의 난자 냉동 보관을 지원해 준다며 제인이 원한다면 파트너 등록을 할 생각이 있음을 내비친다. 구세주의 등장에 고민을 하던 제인은 자신의 회사 보험이 ‘비아그라와 정관수술’은 비용 처리해 주고 있다는 성차별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곤 그걸 고발하고 비판하는 칼럼을 쓴다. 칼럼의 제목은 “난 백마 탄 왕자는 필요 없다. 회사가 평등한 보험을 제공하는 게 필요하다.”


피임·임신·출산을 완성하기까지 온갖 제한과 한계들을 마주하는 여성들에게 ‘저출생 위기’라는 말은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아니, 사실 콧방귀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낙태죄 폐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낙태죄를 폐지하면 모든 여성이 아무렇지 않게 인공임신중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현실 속 여성의 삶을 1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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