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oon Oct 24. 2021

다시, 페르시아만을 향해

팬데믹으로 멈춘 여행의 시간이 다시 흐를 때까지


그 모든 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수많은 다른 세상이 공존한다는 걸
기쁘게 보고 듣고 맛보던 시절은
다시 돌아올까



지난 몇 년간 해마다 한두 번 이란을 방문했다. 팬데믹으로 여행이 불가능했던 2020년 내내 가장 그리웠던 건 이란 음식이다.

추운 겨울 바자르에서 들이켰던 뜨끈한 아쉬 한 그릇, 바르자네 사막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던 석류를 넣은 잔치 음식 파센준, 이란 친구가 만들어준 노란 사프란 밥을 곁들여 먹는 고르메 사브지, 이탈리아 계란 요리 프리타타를 닮았지만 잘게 다진 허브를 계란만큼 촘촘하게 밀어 넣은 쿠쿠 사브지, 토마토 베이스에 병아리콩과 양고기를 넣고 푹 끓여 돌항아리에 담아내는 특별한 음식 디지, 친구네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타브리즈 특산 요리 쿠프테, 쉬라즈의 시인 하페즈 무덤 앞 길거리에서 팔던 소금에 찍어 먹는 신선한 초록 아몬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오는 새하얗고 향긋한 발효 음료 둑, 40도에 이르는 슈슈타르의 더운 봄날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노란 사프란 주스와 버팔로 아이스크림, 아흐바즈의 아랍식 길거리 커피.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가장 그리운 건 고소한 ‘타딕’, 밥을 지을 때 솥 바닥에 형성되는 바삭바삭한 황금색 층인 이란식 누룽지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이란 사람들이 들으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살이 찔 거라고 걱정하면서도 타딕을 좋아하는 마음을 살짝 표현하는 이란 사람들이 꽤 있었다.

밥솥 바닥에 형성되는 바삭바삭한 황금색 층, '타딕'을 뒤집어 접시에 올린 모습


이란은 지역마다 문화와 언어, 기후와 음식의 특색이 뚜렷하게 달라진다. 몇 차례 여행에서 이란의 북서쪽, 자그로스산맥을 비롯한 서쪽, 클래식 루트를 따라가는 유명한 관광지들을 다녀왔지만, 아직 가보고 싶은 곳, 이미 가본 곳에서도 구석구석 다시 들르고 싶은 곳들이 끝없는 이야기처럼 남아있다.

재난시대가 올 줄 몰랐던 2019년에는 이란에 두 차례 다녀왔다. 이란의 클래식 루트를 친구들과 3월 말에 다시 돌아본 후 한국에 돌아와 몇 가지 일을 정리하고, 4월 말에는 자그로스산맥에서 수천년 간 유목 생활을 해온 박티아리 유목민의 봄철 이동 방목을 따라갔다. 그땐 또 뭔가에 지나치게 빠진 게 아닐까 자책도 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더 오래 머물다 가라는 이란 사람들의 다정한 말에 귀 기울일 걸 그랬다.


자그로스의 봄 풍경

2019년의 두 번째 방문에서, 몇 주 만에 다시 찾은 테헤란은 포근한 봄날을 지나 무더운 여름을 맞았고, 때는 마침 해마다 빨라지는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 라마단 기간이었다. 숙소에서 고픈 배를 달래느니, 여행자에게 허용되는 금식 면제 혜택을 누리기 위해 서둘러 자그로스산맥을 향해 길을 떠나기로 했다. 테헤란의 메라바드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아흐바즈 공항에 내렸다. 슈슈타르로 이동하여 뜨거운 태양과 흙먼지, 물살이 거친 카룬강과 기원전에 지어진 놀라운 관개시설을 구경한 후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 오랜 시간에 걸쳐 차를 타고 아득한 설산을 향해갔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자 새봄을 맞은 깊은 산속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몇 주 전에 아직 녹지 않은 눈 때문에 돌아가야 했던 길들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지금이 바로 박티아리 유목민들이 겨울 방목지에서 여름 방목지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다. 네 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유목민 가족과 만나 이동을 시작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벼랑을 타고 올라가는 산양 떼들을 따라 매일 새벽 짐을 싸서 당나귀에 싣고, 해가 지면 텐트를 치고 자는 생활을 며칠 반복했다.

상상만 하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흠뻑 빠져 지낸 나날이었다. 유목민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 산양과 당나귀의 상태에 집중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충동적으로 보이는 결정에도 다 설명하지는 않는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박티아리 유목민 가족과 함께 했던 밤

두 해 전 가을에 좀 더 규모가 큰 가족을 만났을 때는, 밤이 되면 이동을 멈추고 텐트를 친 후 불을 피워 차이 주전자를 올려놓고, 가족 중 연장자가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이란의 민족시인 피르다우시(Firdausī, 935~1020)가 지은 페르시아의 역사를 노래한 대서사시)를 들려주었다. 이어서 젊었을 때 곰을 만난 이야기를 곁들이고, 누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따뜻하게 맞아주어서 고맙다고 하자, 그 먼 곳에서 찾아와줘서 더 감사하다는 이란인다운 우아한 답이 돌아왔다.

2019년의 두 번째 이란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남쪽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셰르, 시라프 항구, 케심 섬, 호르무즈, 반다르아바스, 차바하르, 베르스 항구가 포함된 여정, 아프리카와 인도 문화의 영향이 뚜렷한 그곳, 푸른 바다와 황금빛 사막이 만나는 페르시아만을 향한 여행 계획은 그렇게 시작됐다.


누구와 가는지가 중요했던 여행:
페르시아만으로 함께 떠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같이 갈 사람을 찾기로 했다. 지난번처럼 지프 한 대로 이동할 거라면 신청자 세 명에, 가이드, 통역, 운전을 맡아줄 두 명으로 구성된 최대 다섯 명이 가장 좋다. 이번 여행에선 이란에서 무엇이든 잘 먹을 사람과 같이 가고 싶었다.

도시의 레스토랑에서 맛보는 화려하고 비싼 음식만이 아니라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낯설고 소박한 음식을 궁금해하고, 야외에서 대충 만들어 먹는 생존식에 적응할 수 있으며, 낯선 향신료의 매혹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사람. 덧붙이자면, 여행 인프라가 충분치 않은 곳을 다니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해결 방법을 함께 찾는 쪽에 가깝고, 며칠 씻을 수 없거나 야외 노천 화장실을 사용하는 환경에도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다. 가장 먼저 떠오른 한 사람, 지크에게 연락했다. 이후 지크가 한 사람을 더 찾았고, 같이 갈 세 명이 모두 모였다.

이번 페르시아만 여행에서도 가능하면 사라와 함께하고 싶다고 여행사에 부탁했다. 이란을 여행할 때, 특히 대도시를 벗어나면 세심하고 차분한 사라의 통역 덕분에 혼자 여행했더라면 몰랐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풍부한 감정이 담긴 눈과 몸짓으로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해주던 사라가 좋았다. 자그로스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어 혼자 남겨졌을 때, 돌에 이름을 새기며 신에게 기도했다는 사라의 이야기는 몇 번 들어도 지겹지 않았다.

박티아리 마을의 우리가 머물렀던 집에서, 손님을 맞아 장작에 불을 붙이고 꼬챙이에 신선한 양고기를 끼워 케밥을 굽고 있다


사라와 두 번째로 함께 여행했던 일정의 끝 무렵, 유목민 선조를 두고 있지만 지금은 정착한 박티아리 마을에 들렀을 때다. 하룻밤 묵기로 한 집에서 여행을 이끌어준 모함마드와 바깥주인은 케밥을 굽고 사라와 나는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대도시 테헤란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도 이란의 자그로스산맥 깊은 곳에서 사는 삶은 낯설었을 것이다. 나만큼 서투르게 일하던 사라가 아이에게 젖을 주던 안주인에게 아이를 낳은 후 건강은 어떤지, 앞으로 가족계획은 있는지 물어보며 느리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안고 있는 아기에게 소홀한 기색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건강이 악화될까 걱정되어 더는 낳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이 엄마에게 이 마을에서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도 가능했을지 사라를 통해 물어봤다. 차분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금 남편을 골랐을 때처럼 누구와 할지 고려는 했겠지만 혼자 사는 걸 상상해본 적은 없다며, 사촌인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저녁 요구르트를 올려 새콤한 맛이 도는 따뜻한 수프와 샐러드, 손님맞이용으로 특별하게 준비한 케밥을 맛있게 먹었다. 곁들여 나온 밥이 유난히 맛있었다. 지난해 가을에 세차게 물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온 가족이 처음 수확한 벼 이삭을 털고 있던 걸 기억하냐며, 그때 함께 자루에 담았던 쌀로 지은 밥이라고 했다.

저녁 식사 자리를 함께 정리한 후, 흙바닥에 깔린 카펫에 손님용 이불을 끌러 펼쳤다. 그새 깊이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문득 사라가 내게 물었다. 더 자주 여행하면서 원하는 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낯익은 질문에 뭐라고 답할지 한참 생각하다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잠들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와 페르시아만 여행 일정을 부탁한 지 며칠이 지나고, 상세한 여정을 담은 사라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 지역을 두루 다녔고 곳곳에 숨겨진 최고의 장소를 보여줄 수 있으며 요리 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모함마드 레자가 함께 가기로 했다. 바닷가에서 불을 피워 그곳에서 구한 신선한 해산물을 맛있게 조리해 먹을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어쩌면 간단한 이란식 캠핑 요리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팬데믹으로 중단됐던 2020년 초 페르시아만 여행 경로


모두의 재난, 팬데믹:
안전함을 느끼는 각자의 기준이 가능했던 시대는 사라졌다


다가오는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커지던 2019년 말, 한국의 국제 뉴스에 이란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폭격으로 이란 혁명수비대의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란 사람들의 상실감과 분노가 컸을 것이다.  그는 이란 이라크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이란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다에시(ISIS)를 막아낸 인물이었다. 이란은 보복을 다짐했고 미국은 이란의 테러 위협을 제거했다고 공언하며 긴장이 고조됐다.

페르시아만 여행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여행 자제를 권고하던 지역이었다. 현지 소식을 통해 실제로는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외부의 인식과는 달리 여행하기에 충분히 안전하다고 내린 판단을 다시 고려해야 할 상황이었다.

함께 여행하기로 한 셋 중 한 사람의 가족이 크게 우려하며 여행을 취소하도록 권유했다. 시시각각 국제 뉴스를 새로 고침하며 주시하던 중,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테헤란 상공에서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인지 격추인지 분분한 가운데, 결국 미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던 이란 혁명수비대의 오판으로 민간 여객기를 겨냥했다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란 대통령의 사과가 이어졌다.

2020년 1월, 우리 세 사람은 이번 여행을 취소하기로 했다. 이란으로 향하던 수많은 여행객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행사에 메일로 취소 소식을 이미 알렸지만, 여러 번 함께 여행했던 사라와 스카이프를 통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아쉬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혼자라도 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가능하다는 답을 들은 후, 함께 가기로 했던 셋 중 그때까지도 비행기표를 취소하지 않은 지크가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외교부 웹사이트에서 주황색이었던 그 지역은 새빨간 색으로 변해 있었다.

지크와 나, 단둘만의 여행이 됐지만, 출발지는 각자 달랐다. 그는 2월 초에 중국에 입국한 후 2월 8일까지 따로 테헤란에 도착하기로 했다. 1월부터 중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 환자의 소식이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그 병을 유발한 바이러스가 사람 사이에서 전파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월 20일에 한국에서도 첫 번째 환자가 발생했고, 1월 23일에 우한 봉쇄가 시작됐다. 곧 중국에 들어가야 할 지크가 걱정스러웠지만, 여태까지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위기라고 여겼다.

그러던 중 2월 2일에 상하이-테헤란 항공편이 갑자기 취소됐다. 면적이 서울의 14배인 거대도시 우한에 적군도 아닌 자국 정부가 전시에나 사용하는 ‘봉쇄’라는 수단을 적용했다는 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내가 예약한 인천-테헤란 러시아 항공편은 아직 취소 소식이 없었다. 이번엔 혼자라도 가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병은 무증상 감염으로 전파될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여행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고 언제 어디서 누가 걸릴지 알 수도 없다니, 암담하면서 갑갑해졌고 두려웠다. 내 주위 사람들이 걱정할 수도 있는 낯선 지역을 향해 가더라도, 현지 소식을 통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 약간의 모험을 같이 즐길 사람을 찾아 여행을 계획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재난시대가 온 것이다.

따뜻하게 손님을 환대하기로 유명한 이란 사람들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온 낯선 이들을 경계심 없이 대할 수 있을까. 장거리 이동 중 어디선가 감염되었다가 반가움이 담긴 악수와 포옹, 함께 음식을 나누는 다정함이 병을 전파하는 매개체가 될지도 모른다. 여행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서 몸이 약한 가족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


2020년 2월 13일, 여행을 계획해준 사라에게 메일을 보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란을 둘러싼 불안한 정세 때문이 아니라, 중국에서 시작되어 가까운 나라로 번져갈 게 확실한 원인불명의 전염성 폐렴 때문에 여행 일정을 미뤄야겠다고, 언제든 상황이 안정되면 가겠다고 약속했다.

사라가 일하는 여행사는 몇 달 전 불안한 국제 정세 때문에 취소 요청이 줄지었는데, 새로운 전염병 때문에 다시 위기를 맞게 됐다.

매체를 통해 접하는 우한의 소식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었고, 늦어도 반년 정도 기다리면 될 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19일, 이란의 종교 도시 쿰에서 첫 확진자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과 정치, 경제적 교류가 잦은 도시였기 때문에 어쩌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사는 곳, 대구도 마찬가지였다.


by 박효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