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여행자의 기억으로 시대를 기록하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주 되뇌었던 말이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에서 본 '2020년'의 새해는 그저 평범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펜데믹 pandemic* 이 시작된 것은 2020년 3월부터였다. 그 후 1년 동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대미문 前代未聞**의 상황들이 펼쳐졌다.
2021년에도 코로나는 여전히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각국의 국경 봉쇄와 대도시의 락다운, 유래 없이 빠른 백신 개발에도 불구하고 감염자 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변이 된 바이러스들이 등장하고 있다. 펜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폭우와 폭염 등 감당하기 힘든 기후 현상들이 찾아들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기후변화는 동전의 양면 같은 전 지구적 재난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새로운 '역병'과 '기후변화'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재난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펜데믹: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
*전대미문前代未聞: 지난 시대(時代)에는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뜻 매우 놀랍거나 새로운 일을 이르는 말
펜데믹 시기의 여행, 장소가 관계를 벗어나다
살아온 시간이 평균적인 중반부를 지나자 나의 여행경력은 20년을 가뿐히 넘어섰다. 혼자 혹은 함께 공항을 찾을 때마다 공항은 항상 번잡했고, 세계 어디를 가도 여행자로 넘쳐났다.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까지 조금씩 더 멀리 더 길게 여행을 다니면서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인간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상은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펜데믹이 가져온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여행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세상이라니!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 마치 세상을 처음 살아보는 기분이었다. 만화영화에서 보여준 2020년에는 우주여행도 가능했는데 말이다. 몇 개월만, 반년만, 1년만... 참고 견디면 다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주기적으로 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슬픈 예감만 짙어졌다. 언젠가는 국경을 넘을 수 있겠지만 그때는 이미 내가 그리워하던 '그곳'이 아니리라, 좋은 시절은 가버렸구나…
여행자에게는 진정한 세기말이었다.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 세상에는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행기로 국경을 넘는 해외여행에 대한 사회적 금단현상이다. 팬데믹이 장기화되자 여행에 목마른 사람들은 여행 같지 않은 여행에 몰두하기도 한다.
자동차에서 잠을 자는 캠핑여행인 '차박'과 착륙지 없이 외국 영공을 통과하여 다시 출국 공항으로 돌아오는 '무착륙 관광비행' 등, 이런 여행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여행의 '장소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펜데믹 이전에는 거주지가 아닌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이 여행의 본질적인 요소였다면, '차박'과 '무착륙 관광비행'에서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로컬에 머물거나 어느 한 곳에 닿지 않아도 여행을 떠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몇 가지 장치만 세팅되어 있으면 충분하다. 동남아 리조트 같은 분위기를 가진 숙소와 국내의 해외(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여행지인 제주도에 사람이 몰리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다수의 낯선 사람들과 여행을 떠나는 일은 안전하지 않기에 홀로 떠나거나 가족, 친구와 함께 동행하며 여행지의 주민을 접촉하는 일도 거의 없다. 팬데믹 시기의 여행은 여행의 본질이라 여겼던 로컬의 장소성과 관계를 모두 벗어나버린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여행의 경험이 아니라 여행의 욕구를 소비하고 있다고 봐도 될듯하다
코로나 2년 차 여름휴가 트렌드, '캠핑', '차박' 여전한 인기
우리가 재난시대의 여행을 기록하는 이유
1990년대 매스투어리즘(대량관광시스템)의 성장으로 해외여행은 대중적인 여가문화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에는 소셜 네트워크와 온라인 플랫폼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다양한 여행 비즈니스가 발전할 수 있었다. 여가문화와 자기 계발, 사회문화적 트렌드의 중심에는 항상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전 세계인들은 여행에 열광하고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여행의 시대'였다. 마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처럼 '여행의 시대'는 펜데믹이 닥치기 전까지 찬란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프라인, 온라인 세상을 통틀어 가장 인기 높은 콘텐츠는 여행 경험에 대한 개인의 기록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여행 경험을 다양한 채널로 공유하여 돈을 벌고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시대였다. 펜데믹 시기에 이동이 제한되자 여행 욕구를 소비하는 상품들이 늘어나지만, 소비경험이 여행기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기후변화를 초래해온 매스투어리즘의 붕괴는 관광업계의 몰락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으로만 조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행을 떠나기 힘든 재난시대에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역사성, 장소성, 관계성이 모두 탈각되고 낭만화된 경험만 남은 여행의 기록은 과잉화된 여행욕구를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여행자가 '여행'을 기록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펜데믹은 기존 관광시스템과 여행 방식을 뿌리째 뒤흔드는 시대적인 사건이다. 이런 시대적 전환기에 '여행자' 개인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우리 모두가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시대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여행' 자체가 아니라 여행에 투영된 시대적인 맥락을 담은 기록들은 전환기적 시대를 세밀하게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여행자인 우리는 펜데믹이 시작된 가까운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며 재난시대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과거로 회귀하고 싶다는 바람과는 상관없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분명히 코로나 이전의 세상과는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우리의 여행은 전염병과 혐오라는 양날의 칼 위에 서 있다. '여행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매스투어리즘은 종말을 맞이하고 있고, 인류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니면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외면하기 힘든 시대이다. 과연 세기말을 경험한 여행자의 기록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기록이 향하고 싶은 곳은 여행의 지속 가능한 미래이다.
by 허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