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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oon Oct 24. 2021

우리는 함께 떠나지 못했다

떠나지 못한 이란 여행, 인연은 이어지고 

2020년 2월 2일, 이란행 항공편이 취소되었다

꽤 오랜 시간 고민하고 결정한 2020년 2월의 페르시아만 여행은 한순간에 무산되어 버렸다. 내가 이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던 것은 2019년 9-10월 즈음이었다. 완전히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2020년 2월 2일까지 준비과정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반드시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던 터라 한 순간에 여행 자체가 무산되어버리자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여행을 확정 짓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곳을 여행할까 해!"라고 말했을 때,  대부분이 "거긴 뭐하러?"라는 마땅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란이라는 나라가 여행 따위는 상상도 못 할 위험천만한 지역도, 문화 역사적으로 볼 것 하나 없는 그런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예전엔 나 역시 이란이 귀를 통하여 뇌에 도착했을 때 썩 괜찮은 여행지로 맞닿아 있는 곳이 아니긴 했다. 물론 페르시아만 여행을 확정했을 때쯤엔 그곳에 대한 설렘과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중국발 항공편 취소를 알리는 카타르항공 메시지 

그러나 이번 여행 진행 자체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던 2020년 1월 이란에서 있었던 항공기 격추 사건과는 별개로 항공사의 일방적 항공편 취소가 결국 나를 이란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테헤란으로의 출국을 불과 5일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혹은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미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그 주변 아시아 국가로 번지고 있었고 중국 정부는 심지어 최초 발생지로 여겨지는 우한 도시를 전면 폐쇄하고 통제했기 때문이다. 아직 형체는 불분명했지만 사람들을 공포로 밀어 넣으며 서서히 수면 위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이란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살아오면서 여행하고 싶은 곳, 여행해보고 싶은 나라로 손에 꼽아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어떻게 이곳을 가볼까 생각하게 되었는지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소개해야 할 나의 지인이 있다.



인연의 시작 : 또 다른 여행자, 히커리


그녀(이 글에서 나는 그녀를 “히커리”라고 부르려고 한다)-히커리를 처음 만난 것은 2017년 3월 3일 강원도 양양의 어느 어촌에 있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그곳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까지 가는 여행을 함께 했던 일행과 뒤풀이가 있었다. 히커리는 우리와 함께 바이칼 호수로 떠난 멤버는 아니었지만, 이 시베리아 여행의 주최자인 여행가와 2017년도에 이란 여행을 함께했다. 그들의 이란 여행이 끝난 후 히커리는 혼자 다시 이란을 여행했으며, 마침 그날은 히커리가 한국으로 입국한 당일이라고 들었다. 히커리의 다음 여행은 그 여행가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을 가는 것이었고, 이것은 내 다음 여행과 교차되었다.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은 우리 인연의 시작점이 되었다. 밖이 어둑어둑 해지고 나서야 히커리가 게스트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양양누릉지게스트하우스 

그날의 히커리는 마치 집 문밖을 막 나서서 여행을 시작하려는 여행가처럼 보였다. 그녀는 긴 여행 후에 오는 어떠한 흐트러짐도, 초췌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그날 히커리의 얼굴은 막 여행을 떠날 사람처럼 설렘으로 상기되어 보였다. 한 가지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장기간 이란에 체류하다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히커리의 캐리어는 긴 여정 대비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히커리를 어느 정도 알고 난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은 그녀의 군더더기 없는 성격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였던 듯하다.

히커리는 그 여행가와 이래저래 잠시 안부를 주고받고 낯선 무리들과 인사를 나눈 후 가방을 열어 멀고도 낯선 곳 이란에서 가져온 간식거리를 우리들의 술자리에 기꺼이 꺼내 놓았다. 



내가 그린 히커리의 모습 

덕분에 강원도 양양 어느 어촌 마을의 한 귀퉁이 술자리는 풍성해졌다. 밤이 깊어지고, 이야기가 길어지자 히커리에게도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여행가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인간관계 확장에 능숙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나는 그날 우즈베키스탄을 함께 여행할 히커리와는 오히려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미지의 낯선 어떤 곳을 여행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을 알아가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다.

그리고 한 달 뒤인, 2017년 4월 3일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다시 히커리를 만났다. 우리는 그날 인천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떠나는 7명의 멤버 중 두 사람이 되었다. 그 후 한 번의 여행을 다시 함께 했으며, 조금씩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 듯하다. 


이란 여행을 결심한 이유 


나는 여행지로 낯선 곳을 선호하는 편이다. 가급적이면 모든 것이 낯설면 좋겠다. 의복, 문화, 가옥, 음식, 자연환경, 언어 등등 종종 난처하고 알듯 모를 듯한 상황이 발생되는 것도 대체로 즐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너무 편향해서 판단하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그런 곳을 선호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익숙하고 좋았던 곳은 가고 ‘또’ 가고 ‘다시’ 가고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다시 이란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란은 이전에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여행지였다.  문득 어느 순간 히커리를 통해 인지하게 된 이란은 내게 무척 낯선 곳이었다. 이미 몇 차례 이란을 경험한 그녀가 처음 나에게 "기회가 된다면, 같이 그곳에 가보자" 했을 때는 사실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빈말이 살벌한 전쟁터의 총알처럼 날아다니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던가?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 "술 한번 하자", "어디 같이 가보자"등등. 그러나 어느 순간, 히커리의 이란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 진심의 원천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곳에 분명 뭔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더 강렬해졌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보고 겪은 그 특별함을 나도 보고 싶었다. 더불어 이란 여행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선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한 나는 이란을 향한 마음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이란과 관련된 소소한 기억이 있다.


상하이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된 중국 이름으로 “迪(마디)“라고 불리는 이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상냥한 이란 새댁이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는 마디는 혼자 이곳, 상하이에 나와서 중국어와 서예를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집으로 나를 식사 초대해 주었다. 마디가 꽃집을 들르는 것을 가끔 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그 꽃들이 마디의 식탁 위 화병에 단정하게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꽃들은 타국에서 외로울 그녀의 공간을 따뜻한 온기로 채우고 객인 나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꽃은 그저 남이 주면 받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해 풀 한 포기 사본적이 없던 나는, 그 작은 꽃들이 그 공간에 내뿜는 따사로운 온기에 조금은 압도당했다. 그 따스함이 도는 분위기는 전적으로 호스트인 마디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샤프란을 넣은 이란 쌀요리 

그녀의 집에 함께 도착한 후, 마디는 서둘러 식사 준비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은 음식을 차려 내었다. 그녀가 해준 음식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사프란을 넣고 끓여 익힌 노란 쌀에 버터를 추가해 볶고 그 위에 초록 허브를 뿌린 밥이었다. 조금은 염려스럽고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그녀의 눈빛에 나는 맛있다고 말했지만 처음 한 입은 상당히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손이 갔다.

이란 가정식 샤프란 밥은 그때 처음 한 번 먹어본 것뿐인데, 시간이 꽤 흐른 후에도 생각나는 맛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은 며칠이나 그 맛이 떠올라 사프란을 구해 사프란 밥 만들기를 한번 시도해 본 적도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저 새로운 음식이 창조되었을 뿐 마디가 해준 그 맛은 절대 재현해 낼 수가 없었다.


이란 사람들은 손님을 신이 보낸 귀한 존재라고 여겨 진심과 정성을 다해 그들을 접대한다고 한다. 마디도 나에게 그랬던 듯하다. 꽤나 오래전이지만 마디의 상냥한 미소, 따뜻한 어투, 그녀가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 그 소소한 기억들이 나를 그 기억의 순간으로 불러 세우는 것만 같다. 아마 이런 내 자잘한 기억들이 히커리가 나에게 전달해 준 이란의 아름다운 어떤 것들과 만나 나를 이란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각박하다 못해 야박한 세상에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내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누는 문화가 곧 생활인 사람들이 사는 곳. 여전히 전통이 유지되고, 그들만의 템포로 살아간다는 그곳에 많이 가 보고 싶어 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슬람권 문화의 여성이 그렇게 타국에 홀로 나와서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공중분해된 여행의 설렘에도 떠나려고 했지만 


2019년 10월쯤 그간 말로만 오가던 이란 여행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믿을만한 멤버와 탄탄한 가이드가 존재했기에, 잘 알지 못하는 이란으로의 여행은 날마다 새롭게 셋업 되었다. 2020년 1월 8일 여객기 격추가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2020년 1월 8일,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을 출발한 우크라이나 국제항공(UIA) 소속 PS752편 보잉 737-800 여객기가 이륙 2분 만에 추락한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나의 설렘도 함께 격추된 듯하다. 격추된 감정 부스러기들이 우려와 걱정으로 대체되었다. 이란 땅에 발도 디디기 전에 공중분해될 수도 있다니, 언젠가 여행하다 죽어도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 경우의 수에 ‘격추된 공중분해’는 없었다.


우리 모두는 혼란과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히커리는 우리 중 가장 빨리 이성을 찾았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 또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정보를 취하는 대로 우리 두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우리가 무슨 결정을 하든 존중하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모든 결정을 유보했다. 그게 캔슬이든 진행이든 두려움은 항상 성급한 결정을 하게 만들었고, 성급한 결정은 늘 후회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 함께든 매일 이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흘러 보내고 나서야 내 의사를 명확하게 했던 것 같다. 여전히 유보 상태에 있던 내 이란 항공권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 내 마지막 결정에는 히커리와 그곳 투어팀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칠 때 그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보인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나는, 이런 상황을 대처하는 그들의 방법에 약간은 감동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선택 상황에서 나에게 더 신뢰감을 주었던 듯하다.


‘이런 일(격추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면’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했다. 이런 일은 다시 있어서도 안되지만 있을 수도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고 듣고 있는 것과 내가 가서 직접 보게 될 그곳은 의외로 많이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힘을 실어준 히커리가 있었기에,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펜데믹이 시작된 이후 함께 이란 여행을 준비했던 우리들끼리 한 이야기지만, 여객기 격추가 우리 머리에 심어 준 공포는 코로나가 우리 삶을 휩쓸고 있는 지금의 공포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운 것이었다.


서울에서 상하이로의 출국을 이틀 앞둔 2020년 2월 2일 카타르 항공사에서 상하이 출발 테헤란 도착 항공편을 취소했음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던 듯하다. 이때 이미 여행 멤버가 세 사람에서 우리 두 사람으로 줄어있었다. 내가 미안해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히커리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아 보였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펜데믹 초반의 여파는 그저 단단해만 보이던 그녀마저도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최선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 또한 페르시아만 여행을 잠정적으로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펜데믹의 그늘은 서서히 더 깊고 어둡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후로 히커리와 나는 더 이상 여행을 함께 하지도 소소한 만남조차도 가지지 못했다. 

그녀는 대한민국 대구시에,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하이시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by 이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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