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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oon Oct 24. 2021

첫 여행이 데려다준 곳

몰래 떠난 인도 여행의 기억들 

여행자 이신정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로 여행을 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그다지 남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고, 각자 삶에서 채우고 싶은 어떤 부분이 있을 테지라고 치부해버렸던 듯하다. 

나에게 여행은 때로는 도피였고 때로는 휴식이자 위로였으며 때로는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거름이 되었다. 나는 여행을 사랑했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에너지로 가득한 느낌이 들었고 그 힘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되돌아보니 그런 이유로 어렵고 힘든 시기마다 배낭을 꾸려 어디론가 떠났던 듯하다. 그리고 첫 해외 배낭여행은 나에게 그런 기억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잊지 못할 첫사랑처럼 말이다. 

그때 내가 했던 그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지금 어른이 된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가족 몰래 인도로 첫 배낭여행을 떠나다  


생물학적으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뜨거운 에너지에 힘입은 유전자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그 후 어머니의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외관상의 인간스러움을 갖추고 세상에 나와 집안의 막둥이로 자랐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다지 부모님의 속을 끓이지 않았고 무난하게 성장했다. 그 말은 그냥 부모님 말씀과 의견을 대부분 수용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자아 형성이 꽤나 늦은 아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별 특징 없이 자라온 내가 선택한 첫 해외 배낭여행지는 인도였다. 어느 날 보게 된 몇 장의 사진이 나를 그곳으로 가도록 이끌었다. 색이 무척이나 요런 했던 몇 장의 사진 때문에 인도로 함께 떠나자는 나를 친구들은 대부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신은 함께 하기 힘들 것 같다며 거절했다. 일부는 ‘유럽으로 가지 그러니? 네가 유럽으로 간다면 동행을 고려해볼게’ 하며 역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자 한 것은 유럽에 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대학 동아리 선배였던 동년배 친구가 함께 하기로 하여 4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도로의 여행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인도로 배낭여행을 간 것을 알게 된 유일한 가족은 형부였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는 항공권과 한 달 여행경비를 모두 커버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에 지원금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부는 하나밖에 없는 처제에게 자상하고 관대했다. 그리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 외 다른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우리 딸 그렇구나 잘 다녀오렴" 이런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취업이라는 큰 난관 앞에서 시간과 돈을 허비하고, 생뚱맞게 인도로 배낭여행이라니 지금 제정신이냐라는 말을 듣거나 학기가 끝나면 당장 고향집으로 내려오라고 하실 수도 있다. 

그러면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소중한 자유의 시간을 취업을 걱정하며 이것저것 하다 끝날 것이었다. 본격적인 입에 풀칠하기를 시작하기 전에 의미 있는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학기가 끝나갈 무렵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번 방학에는 집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곧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좀 바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는 알았다고만 하셨다. 무슨 일로 어떻게 바쁜지를 얘기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무엇을 하던 꼬치꼬치 캐물으시는 분은 아니었다. 나 또한 일거수일투족을 어머니와 공유하는 살가운 딸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짧은 대화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행 기간 내내 불안과 초조 그리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여행 중에 이 여행이 들통이 날까 싶어 평소보다 집으로 더 자주 전화를 하게 되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별일이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하느라 바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별일이 없지는 않았다. 인도에서 별일이 없다면 그게 별일일 것이다. 오만가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날마다 벌어졌고 인도에 도착하고 두 주가 채 못되어 풍토병에 걸려 고열로 며칠을 끙끙 앓아누워 있었다. 정신을 들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했다. 몸이 심각하게 아파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다 가족들에게 들통이 날까 두려웠던 마음이 컸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아셨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시고 걱정을 하셨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저 나의 여행이 들통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날도 나는 “아.. 그냥 전화드렸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도착하자마자 사기를 당했지만, 아름다왔던 하우스보트 


늦은 밤 시간에 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항공기의 문이 열리고 통로로 걸어 나올 때 생전 처음 맡아보는 기괴한 냄새가 나를 덮쳤다. 인도의 냄새였다. 공기의 냄새조차 기괴한 나라에 늦은 밤에 도착한 나와 친구는 인도 여행을 결정할 때만큼 대범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공항 도착장 의자에 몸을 기대어 밤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의 설렘으로 몇 날 며칠 잠을 설쳤기때문인지 시끌벅적했던 공항 안에서도 우리는 배낭을 부둥켜안고 잠이 들어버렸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듯하다. 새벽 4시가 좀 지나고 있을 때 눈이 떠졌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내가 잠든 사이 우리 주위로 인도인들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가지지 않았다. 아마 입국장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옆에 앉은 인도인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공항에서 델리 시내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혹시 택시비는 얼마나 나올지 물었다. 그는 적당한 친절의 범주안에서 자세히 알려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은 택시 기사였고 호객을 해서 현지 여행사에 우리 같은 얼뜨기 여행객을 넘기는 일을 하는 자였다. 물론 모든 사건들이 벌어진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는 우리를 델리 시내까지 태워주겠노라 했다. 그 상냥하고 친절한 인도 아저씨의 차에 오른 순간부터 우리는 연속되는 사기극을 겪어야 했다. 결국 우리 계획에도 없던 인도 북부 스리나가르로 향하고 있었다. 델리에서 6인의 외국인을 태우고 정오쯤 출발한 차는 쉬지 않고 달려 스리나가르에 23.5시간 만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서야 사기를 당했구나라는 감이 오기 시작했지만 델리로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 것은 그곳이 무척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반짝이던 호수, 호수 주변으로 정박하고 있는 하우스보트들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런 곳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이곳의 존재 여부 조차 몰랐던 나에게 이곳은 마치 판타지 세상 같았다. 숙박비 문제로 다시 실랑이를 해야 했지만 나쁘지 않은 가격 네고로 우리는 이곳에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사기로 인해 분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객실 내부는 아름다웠다. 객실바닥 전체에 꽤나 고급져 보이는 카펫이 깔려있었다. 창문에는 우아한 아이보리색 속 커튼과 화려하게 자수 놓인 겉 커튼이 조화를 이루어 달려 있었고, 방 중앙엔 모서리마다 나무 기둥이 세워진 침대가 보였다. 침대 옆으로 고상한 협탁과 잘 깎아 만든 나무의자가 보였다. 침실 천장에는 고혹적인 샹들리에가 걸려있었고 어둠이 내려 조명을 켜자 온 방을 은은한 빛으로 감쌌다. 


이 하우스보트에는 느끼한 눈빛을 가진 깔끔한 옷매무새를 한 젊은 매니저, 아주 가끔씩 눈에 띄던 후덕한 체구의 남자 요리사 그리고 청소 및 기타 잡무를 처리하고 시카라 보트로 우리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던 노인이 있었다. 노인을 늘 나를 마담이라고 불렀으며 언제든 시킬 일이 있으면 자기를 찾으라고 했다. 서양식 조식과 낮시간 시내 관광 동안 먹을 런치박스를 준비해주었고, 저녁에는 배 꼭대기에 올라 쏟아지는 별을 보며 인도식 디너를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인도에 도착하자 말자 사기를 당하고 묵게 된 첫 숙소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객실 문을 나서면 나무 복도가 배 앞쪽에 위치한 거실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 소리는 나에게 이 판타지 세상을 더 현실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침실 창 난간에 앉으면 멀리 호수가 보였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은 그냥 하루 종일 그곳에 앉아 멀리 보이는 설산과 호수만을 바라본 날도 있었다. 옆집의 하우스 보트에는 작가 지망생인 일본인 청년이 한 달째 지내고 있었고, 옆 옆집에는 미국에서 왔다는 나이가 지긋한 백인 할아버지가 2년째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가 나를 불러 그동안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이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그 사진으로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의 사진들은 죄다 초점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호수에서 물놀이하는 소년들의 사진 속 소년들의 얼굴에는 눈코 입이 함께 모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짧은 날들의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 기억들을 너무 달콤해서 잊히지 않는다. 

스리나가르의 달호수(Dal lake)는 다시 가고픈 인도 여행지 중 원픽이 되어버렸다.


여행이 끝나고 나로 살아가기 


드라마틱하게 흘러갔던 인도에서의 첫 한 주가 지난 후에도 여러 사건사고들을 겪으며 한 달 정도 되었던 나의 좌충우돌 인도 여행은 순식간에 그 여정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이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는 마지막 주에는 하루라도 더 빨리 그곳을 뜨고 싶었던 것도 같다.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내리자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순간은 너무나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달에 많아야 두세 번 집으로 전화하는 시크한 막내딸로 돌아왔다. 

내가 한 여행은 도피였을까? 도전이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도피이기도 했고 도전이기도 했다. 상충되는 것 같은 단어이지만 분명 함께 존재했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제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적당한 직장을 구해야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것이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도 여행 중이던 시간 동안 대학 동기들은 다들 취업을 위해 부지런히 스펙을 쌓고 있었다. 나는 우리들이 마치 경기 시작 전 게이트에서 대기 중인 경주마처럼 느껴졌다. 총성이 울리면 미친 듯이 질주할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존재했던 여러 가지 숙제들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가 조금 달라졌던 것 같다. 나도 경주마가 되어보기로 했다.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도 나는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때때로 잘못되었다고 생각된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세상을 우습게 봐서는 안되지만 무작정 겁에 질려있다고 해서 뭔가 해결되는 것은 없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냥 나의 모습으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만의 트랙에서 나를 위해 뛰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분명 성장하고 있었다. 그때의 여행으로 내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행을 즐기는 방식과 세상을 보는 시선을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준 것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여행이 기다려진다.


by 이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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