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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oon Oct 24. 2021

시작한 곳으로 거듭 돌아가는,

내 여행의 시작, 인도 

여행자 박효정 


같은 장소로 거듭 돌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지나간 한 시기에 나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 공항에 도착한 후 이런저런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하고 머물다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첫 번째 여행에선 흥분과 두려움과 기쁨이 가득찬 채 떠났다 아픈 몸으로 돌아왔고, 몇 년 후 피곤하고 지친 마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을 땐 비장하게 그곳을 찾았다가 더 궁금해진 채 돌아왔다. 나중에는 델리에서 점점 더 오래 머물다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심상한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매번 델리로 향했던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그게 뭐였든 대수롭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한 곳을 오가며 반복했던 과정의 언저리에 가라앉은 기억들과 매번 내 기대에 어긋나서 기억 속에 더 오래 남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별 의미 없고 지루하기까지 했던 장소와 시간, 기대한 적 없는 나 자신이 참을 만해지기 시작한 건 그런 순간들을 지나고 나서였다.


도달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여행 가방


파하르간즈의 골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그 사람이 매고 있던 배낭. 그렇게 가볍게 꾸린 여행 가방을 이후에도 다시 보지 못했다. 인도에 와서 마련했을 헐렁한 얇은 바지에 낡은 티셔츠를 입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채 조그마한 배낭을 맨 모습으로, 덥고 시끄럽고 분주한 그곳에서 그는 혼자 걷다가, 뜻밖에 먼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전날 밤 우리 일행은 델리행 비행기에서 인도를 아주 잘 안다는 이를 만나 무작정 따라 간 도미토리에서 잠못 이루는 밤을 지냈고, 이른 오전에 급하게 짐을 꾸려 뉴델리 기차역을 향해 거리로 나선 참이었다. 

오가는 사람과 동물과 온갖 소리와 냄새, 먼지가 섞여 떠다니던 어두침침한 골목 구석에서 우리는 언제 인도에 왔는지, 여기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에게 물었다. 가져온 짐이 그게 다인가요? 그 안엔 뭐가 있어요? 라는 내 물음에 비누 한 장, 수건, 속옷과 티셔츠, 로션, 휴지가 다라고 했다. 가방 안이 보이진 않아도 그 이상은 들어갈 리 없는 크기다. 그때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여권과 돈을 넣은 복대는 따로 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여기서 혼자 다녀요? 그렇다고 끄덕이는 얼굴을 나는 오래 바라봤다. 작별 인사를 나누며 꼭 안아주던 가벼운 팔을 풀고,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조용히 걸어서 떠났다. 

그날 뉴델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플랫폼 변경 안내를 듣고, 꼭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꽉꽉 채운 50리터 배낭을 맨 채 맞은편 선로를 향해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면서, 나는 작고 가볍고 윗 부분이 푹 꺼진 그 배낭이 자꾸만 떠올랐다. 첫 번째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공기처럼 부드럽게 떠오르던 미소와 뒤돌아 먼곳으로 사라지던 그 사람의 모습을 가끔 떠올렸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길을 찾을 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슬픔과 실망으로 가득한 채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기세로 다시 인도로 향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멀어보였던 히말라야로 가는 길에서 나는 2킬로가 넘는 노트북과 DSLR 카메라까지 넣은 빵빵하고 무거운 배낭에 두툼한 침낭까지 매달아 짊어지고 있었다.  

떠날 때와는 달리, 마날리에서 라닥을 향해 가며 길이 험해지고 버스가 아슬아슬한 곡예 주행을 하는 동안 희박해지는 산소의 농도만큼 점점 더 슬픔은 옅어졌다. 비통하고 애절한 노래들이 담긴 MP3를 배낭 바닥에 처박아두고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인도 음악에 젖어들었다. 길을 떠날 때 마음속에 그리던 여행과 그곳에 갔을 때 나를 통해 드러나는 실제 결과물이 왜 다른지 나는 그때까지도 잘 몰랐다. 

첫 여행에서 본 작은 배낭은 내가 여행 가방을 쌀 때마다 꿈꾸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이었다. 이십 년이 넘게 지나는 동안, 길고 짧은 길을 떠나며 크고 작은 가방을 싸고 풀면서 꼭 넣어야 할 물건의 목록은 점점 짧아졌지만 그토록 가벼운 짐은 영영 꾸려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힘들 거란 걸 이제는 안다.


코넛플레이스 스타벅스 앞 차이 노점


길에서 사는 이들도 크고 작은 그늘을 찾아 조용히 몸을 누이는 8월의 한낮, 릭샤 왈라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며 지친 몸으로 땀에 젖어 우리는 뉴델리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둥글게 몇 겹으로 둘러싸인 코넛플레이스는 아직 이곳이 낯선 여행객에겐 뱅글뱅글 돌다보면 다시 제자리인 미로가 된다. 마침내 눈에 익은 초록과 흰색의 동그란 로고가 보이고, 근엄하게 응시하는 경비원의 눈길을 통과해서 무거운 유리문을 연다. 에어컨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옷이 말라 소금기가 군데군데 필 때쯤, 반짝이는 얼음이 가득한 커피를 순식간에 들이키며 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친구와 나는 도시별로 잘라서 가져온 가이드북을 꺼내놓고 다음에 갈 곳을 확인하다가, 한여름 대낮에 시원한 인공 바람 아래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뉴델리에 오는 횟수가 거듭되면서 나는 해질 무렵을 기다려서 숙소를 나서기 시작했다. 굳이 걷지 않아도 된다. 매번 돌아오면서 점점 더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델리가 걷기 좋은 도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산책이란 걸 할 만한 곳까지 가려면 교통편을 이용하는 게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는 길이다. 코넛플레이스에서 가까운 팔리카 바자르는 릭샤를 타고 출발하고 도착하기에 좋은 곳이고, 조금만 걸으면 스타벅스가 있다. 나는 커피 냄새가 새어나오는 문 앞까지 가서, 바로 앞 노점에서 맛있는 차이 한 잔을 사서 손에 들고, 환하게 빛나는 통유리창 앞 화단에 앉을 것이다. 한낮의 열기가 가시면서 원형으로 계획된 코넛플레이스 광장의 하얀 열주가 빛나기 시작한다. 멋진 쿠르타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사람들, 집에 돌아가며 길거리 서점에서 책을 살펴보는 사람들, 점점 더 환해지는 상점의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이 도시에 속한 듯한 기분이 드는 짧은 순간이다. 


아주 멀리 온 것 같았던 다르야간즈


세 번째로 인도에 도착해서, 파하르간즈도 코넛플레이스도 아닌 곳에서 묵어보고 싶어 다르야간즈에 숙소를 잡았다. 다양한 상점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주로 인도 각지의 상인들이 대규모 물품 구매를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일요일마다 이곳에서 열린다는 북마켓이었다. 어쩌면 거기서 읽지 못하는 우르두어로 적힌 미르자 갈립의 오래된 시집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스펀지가 아닌 짚을 깔아 시트 위로 자꾸 빠져나오던 매트리스 위에서 불편한 밤을 지새고 아침식사를 하러 숙소를 나섰을 때, 파하르간즈와는 다른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이 먼지와 매연이 가득한 다르야간즈 거리 위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도 여행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사람들과 차와 릭샤의 소음이 가득한 곳에 멍하니 서서, 나는 잠시였지만 ‘내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말할 사람도 없는 곳* ’에 마침내 도착한 것 같았다. 

몇 년 후 델리에 메트로가 생겼을 때 지도를 짚어보니 다르야간즈는 코넛플레이스가 있는 라지브촉까지 세 정거장 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

Rahiye ab aisi jagah chal kar jahan koi na ho

Hum-sukhan koi na ho aur hum-zaban

koi na ho

Be-dar-o-diwar sa ik ghar banaya chahiye

Koi hum-saya na ho aur pasban koi na ho

Padhiye gar bimar to koi na ho timardar

Aur agar mar jaiye to nauha-khwaan koi na ho

(Let us go and live somewhere where there is no one

No one who speaks to me in my language, no one to talk to

I will make something that is like a house

(But) There won’t be any neighbours, nor anyone to guard it

Were I to fall ill, there will be no one to tend me

And when I die, no one to mourn me)


Deewan-e-Ghalib, Mirza Ghalib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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