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데믹의 중심, 중국으로 돌아가다
이란 여행은 무산되었지만, 나는 상하이로 갔다. 나의 삶은 그래도 지속이 되어야 했으니까. 다행히 그 당시 상하이와 서울을 오가는 항공편은 별다른 문제나 변화는 없었다. 2020년 2월 4일 그때는 그러했다.
그러나 2월 4일의 상하이 출국을 앞두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란 여행만큼이나 중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걱정과 우려의 말들을 많이 들어야 했다. 출국 날짜를 좀 연기하는 것이 어떠냐, 한국에 있으면서 상황을 좀 보고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냐, 꼭 가야 하냐 등등. 나 역시도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며 한국에 남아있다 한들 출국 날짜를 대체 며칠로 연기해야 할지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도 없이 반복되는 질문들의 배경에는 이 펜데믹이 과연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 안에 종결되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몇 달은 내가 고려할 수 있는 기간도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있고, 1-2주 연장해봤자 이 상황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이 났다. 출국 보류는 내게 최선도 최상도 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원래의 일정대로 출국하기로 했다.
무서웠을까?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땐 눈이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이 여느 때처럼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나도 조금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그날의 김포 공항과 홍차오 공항은 나를 그리 무섭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포 공항은 예전보다 많이 한산했지만 분위기는 비교적 차분했다. 항공기에 착석하고 둘러보니 의외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예전과 다른 것이 있었다면 출발 항공기 안의 북적거림과 어수선함이 보이지 않았던 것, 그리고 탑승객들의 얼굴에 드리운 비장한 표정인 것 같다. 아주 약간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기내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들 같았다. 분명 나도 그런 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2시간이 안 되는 비행시간이 끝나고 항공기가 홍차오 공항에 착륙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은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되고 염려스러웠다.
우려와는 달리 우리는 예전과 별다를 것 없이 입국 심사대를 통과해 나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눈에 들어오던 도로 위의 풍경도 예전과 비교해 특별하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춘제 연휴가 살짝 지났기는 하지만 춘제 연휴 전후 상하이의 도로는 대체로 한산한 편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하자 마스크를 착용한 보안 경비원이 아파트 단지 출입문 밖에 의자와 테이블을 빼서 앉아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테이블 위에는 파란색 줄이 쳐진 노트와 까만색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 노트에 이름, 여권번호, 동 호수를 기재하라고 했다. 내 체온을 잰 후,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확인하고 그 내용들은 직접 기재를 했다. 그가 메모하는 동안 아파트 단지 안을 들여다보니 조용하다. 아니 고요하다. 모든 기재를 마치고, 아파트 단지 출입문을 통과해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가는 동안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낯설고도 낯선 풍경이다. 이렇게 아파트 단지 내부의 정적은 서서히 나에게 현실감 있는 두려움이 되어 다가왔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집 앞에는 중국인 직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반가운 마음에 멀리서 온 나를 보고 가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다른 아파트 단지에 산다. 이번 춘제 연휴기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강아지와 고양이를 부탁했고 그녀는 흔쾌히 돌봐주겠다고 했다. 우선 짐을 집안으로 옮겨 놓으며 그간의 안부를 잠시 주고받았다. 이번 상하이 입국에는 작고 큰 두 개의 캐리어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작은 캐리어 안에는 한국에서 사들고 온 마스크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얼른 캐리어를 열어 종이백에 마스크를 나누어 담았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사용할 것을 감안해 꽤 넉넉히 넣어주었다. 이미 중국은 마스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된 상태였던지라 예상치 못한 나의 선물에 다소 무뚝뚝한 성격인 그녀의 얼굴에도 고마운 감정들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렇게 많이 나누어 주어도 되는지 몇 번이나 되묻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잠시였을 수도, 잠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고 집 밖에 흐르는 적막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도착한 첫날밤은 침대에 일찌감치 누웠지만, 뒤척이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마도 뒤숭숭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규모가 꽤 크다. 같은 이름으로 1, 2, 3기로 구분 짓는데, 지어진 순서대로 붙은 숫자이다. 1기와 2기는 한 단지에 있고, 3기가 있는 단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내가 사는 1, 2기 단지는 남문, 북문, 동문, 남문과 동문 사이의 사람만 출입이 가능한 쪽문 이렇게 네 개의 출입구가 있다. 남문은 8차선 대로변과 맞닿아 있으며 이 단지의 가장 큰 출입문이다. 문 상단에 아파트 단지 이름이 크게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게 정문인 셈이다. 남문으로 들어와 길을 따라 쭈욱 걷다 보면 북문이 나온다. 북문으로 나가면 4차선 도로가 있고 그 길 건너에 3기 단지의 출입구가 마주하고 있다. 이곳 4차선 도로변에는 슈퍼와 과일가게, 세탁소, 미용실, 약국, 부동산 중개소 등의 상가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 출입구 동문과 쪽문은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폐쇄되었다. 동문은 내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 들어온 문이었다.
상하이에 막 도착한 나는 지금 이곳 상황이 무척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단지 앞 상가들은 영업 중 인지, 주변의 분위기는 어떤지 알아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온 일회용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문을 나섰다. 북문 밖에는 총 세 개의 슈퍼 있는데 전부 영업 중이었다. 슈퍼로 가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각자의 길로 재촉하는 발걸음에서 두려움이 그리고 긴장감이 느껴졌다. 여기 사람들도 급작스럽게 시작된 이 상황에 그다지 적응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슈퍼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몇 보였다. 그들은 차분히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매대가 텅텅 비어 있거나 사람들이 서로 밀쳐대며 물건을 점유하려는 공포스러운 장면은 마주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상하이로 돌아온 후 거의 바로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일반 외부인(아파트 주민의 친지&친구&기타 관계)과 주민의 구분 및 출입 통제를 위해, 주민들이 아파트 밖으로 나갈 때 아파트 관리실 직인이 찍힌 작은 종이를 줬다. 복귀할 때는 보안 경비원이 그 종이를 확인하고 우리가 그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들어올 수 있게끔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아파트 단지들도 이렇게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떤 곳은 한 가구당 한 장 혹은 두 장의 카드를 발급해 준 곳도 있다고 한다. 그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아파트 안팎을 출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곳은 외부인뿐만 아니라, 주민들조차 가구당 외출 가능한 인원수까지도 제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아파트 관리 사무실이 무슨 동사무소도 아니고 엄청 엄격하게 관리하네, 그것도 자기네들 임의대로 룰을 정해서..’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당시는 좀 황당했지만, 돌이켜보면 어느 정도는 아파트 주민들의 안전 확보에 도움이 되기는 했던 듯하다.
어느 날 어쩌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출입문 앞에서 그 종이를 분실해 보안요원에게 신분을 증명하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관리사무소에 연락하고, 집문서 혹은 임대 계약서 등을 확인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고 있는), 그 광경을 본 후 나는 가끔 그 종이를 버리는 척하다 몰래 하나씩 챙겨놓았다. 혹시나 종이를 분실했을 때 발생할 번거로움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사는 이곳은 모든 외부인의 출입이 차단되었다. 주민을 태운 택시조차도 들어올 수 없었다. 상하이에서는 아파트 단지마다 관리실에서 대처 대응하는 방식이 같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어떤 곳은 전면 폐쇄, 출입문 하나, 혹은 둘 개방 또는 타 지역에서 아파트로 돌아온 주민의 수속 절차 등.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물건을 나르던 각종 식료품 배달부와 택배 배달원들은 더 이상 우리 아파트 단지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외부인들의 출입은 통제되었다. 나는 이 외부인들 중 택배 배달원들의 택배는 어떻게 처리할지 무척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아파트 단지 문 밖 길에서 마주한 장면으로 바로 해소되었다. 각 지역에서 배달된 크고 작은 택배 상자들은 도로변을 장악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택배를 찾으려면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와 도로변에서 택배를 지키는 각 택배회사의 직원을 찾아야 했다. 길에서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아파트 단지 출입문 밖에는 간이 수납장이 설치되었고 택배 상자들은 그곳에 정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염병 창궐의 공포와는 별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Door to Door 서비스가 우리의 시간과 체력을 얼마나 세이브해주었는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월 7일은 여행하다 알게 된 또 다른 지인 K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입국하는 날이었다. K는 당시 중국 저장성 우시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던 한국인이다. K는 춘제 연휴를 보내고 2월 7일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아파트의 옆집 문에 자가격리 중이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며, 나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사진에 찍힌 격리 문구가 적힌 스티커는 문과 문틀을 가로질러 붙어있었다. 안에서 문을 열면 얼마든지 찢어지는 것이었고, 저깟 종이 스티커로는 물리적으로 문을 절대 폐쇄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당신은 나와서는 안됩니다.”라는 의도로 저 문에 붙여진 종이 한 장이 나에게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나의 지인 또한 2주간 격리를 해야 했다. 그녀의 문 앞에도 저 스티커가 붙었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에서 상하이로 들어온 또 다른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문 앞에는 작은 기기가 붙어있었다고 했다. 안에서 문을 열게 되면 그 지역 관리청으로 알람이 가도록 해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시기에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말썽을 일으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그는 문을 한번 열어볼까 하는 장난기를 억누르며, 2주간의 격리를 그럭저럭 잘 견뎌내었다고 했다.
입국 11일 후 아파트 단지 주변을 처음 벗어나 보았다. 방문지는 내가 살던 곳에서 6.5킬로 정도 떨어진 한인 타운이었다. 돌아가는 상황도 좀 볼 겸 필요한 식료품도 좀 살 겸 해서 방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은 상태였고, 그곳 역시도 인적이 드물었다. 사람들이 떠나버린 듯 휑한 도로변 상가의 느낌은 마치 방치된 도시의 일부를 보는 것 같았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흐린 날이라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라면 재난 영화 세트장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서늘한 기분이 들어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내 개인적 경험과 그 느낌에 의존한 기록이라는 것을 상기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그날은 공포감으로만 치자면 2020년 2월 4일부터 입국한 날부터 시작해 2021년의 오늘이 순간까지의 중국 생활 중 최고였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랬다. 늘 사람들이 북적이고 번화했던 거리의 상가와 식당들은 굳게 문을 내리고 있었다. 오직 슈퍼만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사려는 물건들도 있었고 서둘러 계산을 한 후 잰걸음으로 대로변으로 쪽으로 걸어 나왔다. 아마 빨리 그곳을 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멀리 베이커리와 커피를 함께 파는 카페가 문을 연 것이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머릿속도 복잡했다. 저 안에 들어가도 될까? 빵과 커피를 사서 바로 나와야 할까? 그냥 저곳에 앉아서 마셔도 될까? 그 순간 내가 바랬던 것은 하나였던 것 같다. 그냥 잠시 그곳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것,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그 순간은 너무 간절했다. '그래, 저 문을 열고 카운터로 걸어가서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주문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커피를 테이블로 가져와 한 모금 마시면 어쩌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지 몰라' 하는 동화 같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이 동화 같은 생각이 진짜이기를 바랐다.
조심스럽게 유리문으로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마스크를 하고 있는 직원 두 사람이 보였다. 빵은 이쁘고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다. 비가 내리던 유리 문밖으로도 맛있는 빵 냄새가 따뜻하게 흘러나왔다. 이미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두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용감하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조각 케이크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물론 집에서도 매일 마시는 커피지만, 그날의 커피는 좀 감동이었고 위로였다. 잠시였지만 마치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불러온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았던 것은 당시 영업 중인 사업장들은 상하이 시정부로부터 영업을 당분간 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 더해 춘제 연휴를 가족들과 보내러 고향으로 돌아갔을 많은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제때 그들의 일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즉 가게를 연다고 해도 근무 가능자가 충분치 못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는 춘제 연휴기간을 연장하게 했고, 가급적이면 이동하지 말라고 재차 권고하고 있었다.
by 이신정